환상처럼 보면 환상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환상에 집착한다면 바보거나 미친 것이다.] 의식을 눈을 뜨고 꾸는 꿈으로 알아차리면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괴로울 때, 우리가 우리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는 반증이다. 생각이 꿈인 줄 알면 사로잡힌 내 생각을 내려놓을 것이고 악몽에서 깰 때처럼 괴로울 게 본래 없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환상처럼 보는 것은 환상처럼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환상이 아닌 것을 환상처럼 보라는 은유가 아니다. 있는 그대로를 여실히 보는 것이 환상처럼 보는 것이다.
T. 1) 원인들의 질서, 오직 변이 만이 있을 뿐이다. 한순간도 동일하지 않는 무상한 변이는, 끊임없이 자연 전체를 변용시키는 관계들의 결합과 해체의 질서이다. 2) 그러나 의식적 존재들인 우리는 이러한 구성과 해체의 결과들만을 받아들인다. 결과들만을 받아들이는 우리, 우리의 생각은 우리가 산출한다는 게 요점이다. 의식은 객관적인 독립된 외부의 [나와 별개인] 무엇이 원인이 되어 나의 신체에 재현된다는 환상을 당연시 한다. 너무나 당연해서 우리는 이점을 알아차리기가 어렵다. 우리는 우리가 보는 것이 우리 신체의 변용을 관념으로 산출하는 결과이지 독립된 외부의 실체로부터 기인한 결과가 아님을 알아차려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보는 저것이 독립된 외부로 여겨지는 체험을 부인할 수 없다. 하므로 이 독..
1.모름의 모름 2.앎의 앎 우리는 모른다. 우리의 잘못은 '모른다'는 걸 잘못 알고 있는 데 있다. 구분하자면 잘못 알고 있는 것, 이것이 문제의 무지다. 잘못 알고 있는 무지. 우리가 보는 실재는 우리가 보는 실재다. 우리가 보지 않는 실재는 우리가 보지 못한다. 저기 독립적이고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실재는 이미 거기 있다고 전제하는 실재다. '거기 있다는 걸 너는 어떻게 알지?' '내가 보니까.' "감각을 일으키는 것을 우리는 절대 알 수 없고 의식의 본성은, 결과들을 받아들이되 그 원인들을 알지 못한다는 데 있다." 우리는 원인들을 절대 알지 못한다. 우리가 보는 것은 원인들이 아니라 결과들이다. 다르게 말해 우리가 보는 것은 우리가 산출하는 실재다. 문제는 알 수 없음의 근원적인 모름의 자리를 목..
화 내지 않는[화를 참는 게 아니라] 수행을 함에 있어. 화는 시비하는 마음에서 나온다. 마음 근본에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마음이 결정되어 있는 것인데[달리 말하면 내가 옳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맹목적이 되는 것인데] 이 시비하는 마음이 사라지면 화를 참을 일조차 없다. '시비하는 마음이 사라진다'는 것은 옳은 것도 없고 틀린 것도 없다는 아리송한 마음가짐이 아니고 내가 옳다는 생각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이다. 상대도 옳다. 서로가 다르다. 옳고 그른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를 뿐이므로 시비하는 마음이 의미가 없다. 개는 맞고 고양이는 틀린게 아니라 서로 다르다. 설령 서로 다른 너와 내가 "모순되는 진술을 할지라도 동시에 옳을 수 있는 다원적인 실재"를 인정하므로서 타자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내가 옳다는 생..
상에 사로잡힌 사람이란 어떤 것일까? "나는 사물들에 대한 집착을 그만두었고 내 자신을 그것들과 부당하게 동일시했던 것을 그만두었습니다."(181) "특별한 누군가로 간주되는 것은 사로잡힘의 한 형태입니다. 더욱이 다른 사람들이 뭐라뭐라하는 속성들을 자신의 뛰어난 자질들과 동일시하는 사람들은 내가 볼 때 맹목적으로 보입니다. 다른 누군가가 내 안에서 보는 것 - 그것은 결코 내 자신이 아닙니다. 그것은 결코 내 자신의 인성이 아닙니다."(있음에서 함으로 314) T. 특별한 누군가로 간주되는 것, 그것은 결코 내 자신이 아닙니다. 나는 그저 나이고 싶다. 그것들과 부당하게 동일시하는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도가도 비상도 도라는 하는 도는 이미 도가 아니다. 명가명 비상명 이름하는 이름은 이미 이름이 아니다. [도라 이름할 뿐 따로 도가 있는 게 아니다.] 도덕경 첫 문구에 대한 나의 이해는 이렇다. '이것이 도다!라고 규정하는 도는 이미 도가 아니다. 도는 언어로 규정되지 않는 신비한 무엇이 아니라 규정하지 않을 뿐이다. 도는 신비롭고 범접할 수 없는 무엇이 아니며 오히려 신비는, 불교의 무유정법처럼 정해진 바가 없는데 있다. 도는 정해진 바가 없다. 도라고 하는 도는 이미 도가 아니다. 또한 도가 정해진 바가 없는데는, 정해진 바가 있으면 도 아닌 것을 부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도다'라고 하는 도는 오히려 진정한 도를 소외시킨다. 여기에 묘함이 있다. 에서 부처님은 강조하신다 ."이른바 불법이라..
누구나 욕구에 기초해 있다. 문제는 욕구에 집착할 때 발생한다. 집착은 소유를 부르고 소유는 소외를 만든다. 소외는 더불어 살아가는 연기적 세계를 파괴한다. 이 소외와 파괴를 회복시키는 감정이 사랑이다. 그런데 이 사랑을 장려할 수 없다. 사랑을 장려하면 또 소외가 생긴다. 소외를 만들지 않으면서 사랑을 유지하는 정합성이 필요한데, 이것은 성찰을 통해서만 가능하여 할 수 있는 건 이 성찰에 초대할 뿐. 그게 다다. 다만 사랑할 뿐이다. 이런 성찰을 통해 한편으론 나를 자유롭게 하는데 주의를 기울이고 동시에 타인을 사랑한다. 이것은 너무도 당연하게 맞물려 이뤄져야한다. "만일 적합한 호칭을 선택하는 게 문제라면, 나는 내 자신을 분리한 상이한 두 영역들- 체계의 내적 동학의 영역과 그러한 체계의 상호작용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