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를 붙들고 괴로워하는 것도 모자라 아직 닥치지도 않은 미래의 일을 염려해 안절부절 못합니다. 이를 두고 미래가 불확실한 탓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 두려움의 실체는 미래에 있지 않습니다. 미래의 일로 걱정하는 현재의 내 마음 속에 두려움이 깃들어 있습니다. 두려움은 알 수 없는 미래에 있는 게 아니라 미래를 걱정하는 현재의 마음 속에 있습니다. 그런 미래에 대한 감정 역시 현재의 내가 짓는 망상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현재입니다. 지나간 과거도, 아직 오지 않은 미래도 지금 이 순간 존재하지 않습니다. 한눈팔 틈 없이 집중해야 하는 시간은 미래도 과거도 아닌 바로 현재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늘 현재를 놓치며 삽니다. 과거를 생각하다 현재를 놓치고 미랠르 걱정하느라 또 ..
공을 이해하는데 있어, 공을 전체의 개념으로 접근하는 방식이 있겠다. 바다 전체로 보면 생겨나지도 소멸하지도 않지만 파도만 보면 파도가 생겼났다 사라진다. 또 물 전체는 변화할 뿐인데 물이 없어져 얼음이 생기고 또 물이 없어지고 기체인 수증기가 생기는. 생기고 없어진다 하지만 변화일 뿐이라는 예시로 공을 설명하는 방식. 상대적으로 이해가 용이하지만 실제적이지 못한 점이 아쉬운 점이다. 그렇게 볼 수 있다는 예시로 만족해야하는 아쉬움. 공에 대한 다른 나나름대로의 이해의 방식을 꼽으면 마뚜라나의 신경체계의 폐쇄성과 스피노자의 신체 변용이다. 내게는 생물학적으로 설명하는 이 접근방식이 더 원천적이고 완전하게 여겨진다. 더불어 신체를 사유하는 스피노자의 신체 변용 설명 방식도 마찬가지. [내가 더 원천적이라 ..
1.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러한 신통을 중요시하는 것을 경계합니다. 비록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꼬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해도 누군가 자기를 욕하거나 물건을 빼앗았을 때 화가 나고 미워지는 것은 보통 사람과 하나도 다를 바 없습니다. 신통력은 번뇌가 없고 걸림이 없는 자유로운 사람이 되는 경지와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2. 신통이 중생을 미혹케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이 용하다는 점쟁이나 무당에게 찾아가 신통을 구하고자 하는 것도 실은 돈 있고 권력 있는 사람에게 굽실거리는 것과 같은 마음입니다.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그가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거기에 매달리고 의지하며 신격화해서 스스로를 노예로 만들어버립니다. 심지어 신통력이 클수록 도가 깊은 것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도 ..
1. 조선시대의 유학자 퇴계 선생의 맏아들 이준의 아내는 봉화금씨였다. 퇴계는 맏며느리를 맞을 때 상객으로 사돈댁에 갔는데, 사돈댁 집안 사람들로부터 미천한 가문이라며 외면과 홀대를 받았다. 당시 봉화금씨 집안은 5대에 걸쳐 벼슬아치들이 이어져 명성이 드높은 집안이었다. 퇴계가 맏아들의 혼례를 끝내고 사돈댁을 떠나자, 봉화금씨 일가 친척들이 몰려와 이렇게 따져 물었다. “우리 가문의 규수는 어느 명문가에라도 시집을 보낼 수 있는데 하필이면 진성이씨 같은 한미한 집안에 시집을 보낸단 말이오? 그런 사람이 이 집안에 앉아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 가문을 더럽힌 셈이오.” 그러면서 퇴계가 앉았던 대청마루를 물로 씻어내고 대패로 깨끗이 밀어버렸다고 한다. 후에 그 이야기가 퇴계 집안에 알려지자 이번에는 모욕감을..
[불수자성 수연성] 본래의 자성을 따르지 않고 인연을 따라 이룬다. 1. 이해관계로 인연이된 사람은 불수자성수연성을 어떻게 실천해야 할까? 이해관계는 서로의 손해와 이익이 걸려있는 관계다. 내 생각에 인연을 따라 행한다는 것에는 손해와 이익에 따라 이룬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손해나는 것을 하지 말고 이익되는 것을 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런 이치이다. 이해관계가 인연을 따른다는 건, 4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이익이 생기는 일을 해도 될 때는, 하지 않는 게 손해다. 이익이 생기는 일이라도 하지 말아야 할 때는, 하는 것이 손해다. 손해가 생기더라도 해야할 때는, 하는 것이 이익이다. 손해가 생기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될 때는, 하지 않는 게 이익이다. 인연을 따라 이루지 않고 손해와 이익만 쫓아가..
1. 하지만 부처님은 그 모든 구분에 정해진 기준이나 실체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상황과 조건에 따라, 인연이 어떻게 일어나느냐에 따라 그것은 선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악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인연에 상관없이 하나로 고정되어 불변하는 성품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2. 내 생각과 관념을 떠난 눈으로 넓고 길게 본다면 행위 자체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해 관계나 가치관, 관념이나 상황에 따라 그 모습이 선이 되기도 하고 악이 되기도 합니다. 3. 이것은 역사를 통해 살펴보면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김유신도 계백도 다 훌륭한 장군입니다. 당시 신라 입장에서 보면 계백이, 백제 입장에서 보면 김유신이 악인이었지만 지금 우리의 눈에는 두 사람 모두 조국과 역사를 위해 자신의 삶을 바..
약견제상비상. 상을 보면서 상 아닌 것을 보는 이중 보기는 상이라는 분별을 보면서 상 아닌 것, 즉 상이 분별임을 본다. 은 이 이중보기를 숱하게 반복한다. "일체 법은 곧 일체 법이 아니므로 이름이 일체 법이니라." 이런 식으로 반복되는 여러 번의 서술은 내가 보기에, 있는 그대로를 여실히 보는 방법인 이중 보기를 제시하는 예들이다. 하나 집고 넘어갈 것은 '이름일 뿐'이라는 분별을 두고 깨달음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거나 도를 언어 바깥의 무엇으로 생각하면 난감하다. 언어가 아니고선 깨달음을 말할 수 없으며 언어로 말미암아 성찰이 가능하다. 인간은 언어적 영역에서 동물과 구분된다. 인간만이 깨달을 수 있다.
1. 옛날에는 호랑이가 마을로 내려와 사람을 물어 죽이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부모가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다면 그 자식은 원수를 갚을 작정으로 호랑이를 잡겠다고 나설 겁니다. 그렇게 분노와 적개심에 차서 호랑이를 죽인다면 그것은 살생이고 그때의 마음은 중생심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다시는 나 같은 불행을 당하는 사람이 없도록 살생의 죄업을 받겠다는 마음으로 호랑이를 죽인다면 그것은 중생심이 아닙니다. 그러한 행위는 한풀이도 복수도 세상을 외면하는 것도 아닌, 보살이 세상을 정토로 만들어가는 마음입니다. 만약 호랑이가 마을의 다른 사람을 물어 죽였다면 안타까운 마음은 들겠지만 남의 일이라고만 여기겠지요. 내심으로는 내 일이 아닌 게 다행이라는 마음도 들 겁니다. 하지만 호랑이가 내 부모를 죽였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