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그것은 그것일 뿐, 실체가 없다. 길다고 하나 길다는 실체가 없다. 길다는 짧다와 상대에서 나온다. 길다의 실체가 길다에 없다. 한편 실체는 없는데 작용은 있다. '길다.' 하여 길다라고 하지만 길다가 아니므로 그 이름이 길다이다. 세상은 그냥 있는 그대로일 뿐[사실은 사실일 뿐]이다. 세상은 차이에서 출현하며 차이는 마음[관찰자]이 만든다. 차이에는 옳고 그른 것이 없고 다를 뿐. 다르므로 선택할 수 있을 뿐이고 작용에 대한 결과에 책임을 지는 태도가 내가 사는[또 살고 싶은] 세상을 만들어 가는 길이다.
도대체 그게 맞는 말입니까? 현실세계와 지각된 세계간의 상호결합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요. 색을 지각하는 문제로 되돌아가 보더라도 붉은색이라는 것이 대상의 속성이 아니라 관찰자의 눈에 생기는 인상임은 당연히 맞긴 하지만 의식에게 빨간색이 하나의 색으로 다가오는데 이유가 되는 객체 자체의 특수한 구조가 역시 있어야 한다는 것도 맞지 않습니까? 저는 오히려 거꾸로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에게 붉은 것으로 나타나는 어떤 대상이 있다고요. 그러면 이러한 색에 대한 인상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제기 되지요. 어떤 가정이 여기서 발견됩니까? 빨갛게 칠해진 대상이 바깥 세상에 존재한다고, 그리고 저의 지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다름 아니라 붉게 칠해졌다는 사실이라고 저에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다시 강조 하건대 설명은 관찰된 두 가지 내용을 의미론적으로 묶어낸 결과물로 파악되어야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이래 우리는 우리 문화의 주된 설명원리(인과론적 사유)가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형태에 따라서 관찰된 내용간의 관계도 다르게 표현되었고요. 가령 목적원인과 작용원인이 있습니다. 작용원인이 특히 선호되었는데, 이는 변형규칙에 맞게 미래의 어떤 작용을 낳는 과거의(시간적으로 앞선) 원인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손에 뭔가를 잡고 있다가 손을 펴면 물건이 만유인력의 법칙에 맞추어 아래로 떨어지는 것과 같이, 이 경우 원인은 뒤에서 (시간적으로 과거로부터) 작동합니다. 목적원인은 현재의 행위를 불러일으키는 미래의 작용을 기술하고 있어요. 이 경우 원인은 소위 앞에서 (..
1. 내가 제안하는 바는 선생님들이 자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고 학생들은 아무 것도 모른다는 생각, 학생들의 머릿속을 자신의 생각으로 채워줘야 한다는 생각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생님이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포기하고 자신도 아는 것이 없다는 의식을 가지고 수업을 들어간다면 정말 좋을 것입니다. 선생님도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라는 금언에 기반 한 소크라테스식 무지의 태도를 취해야 해요. 근본적인 무지의 태도를 대변하는 사람들의 입장에 비하면 이 정도만 해도 이미 진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을 아직 모릅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식의 무지자는 뭐를 하나요?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사람들은 무엇을 합니까? 사람들은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1. 그렇지만 당신의 작업은 원래부터 앎을 매개한다는 교육학의 근본의도와 원리적으로 모순되는 것 아닌가요? 당신은 늘 우리의 근원적인 모름을 강조하잖아요. 교사들의 보통의 생각은 자신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고 학생들은 아무 것도 모르며 그래서 배움이란 모름을 점차적으로 제거하는 것으로 파악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쁜 상태를 좋은 상태로, 모르는 사람을 아는 사람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하고서 철을 금으로 바꾸는 연금술사처럼 작업을 하지요. 연금술사의 점진적인 변형이라는 학습이론적 은유로부터 출발하게 되면 학생들은 아주 싼 물질이죠. 그렇지만 다양한 단계를 거쳐서 더 나은, 더 고귀하고 가치 있는 물질로 바뀌어야 하는 물질입니다. 그리고 학생을 바꾸는 마술재료인 효소는 앎(지식)이란 얘기고요. ..
제가 말하는 바는, 모든 사람이 죽는다고 말하는 기본적인 대전제(상위명제)가 살아 있는 사람들과는 아무 연관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다만 하나의 명제로서 두 번째 명제가 그와 연관되고 그 규칙을 따를 때 어쩔 수 없이 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 불쌍한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초래하는 그런 것입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결론이라는 것은 짜인 규칙성을 불러 오는 것에 지나지 않고 그 규칙성이라는 것도 세상의 사실적 관계를 반영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설명이 행해질 때 따르는 그런 논리적인 연역이 절대적 타당성을 갖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믿음입니다. 그런 확실성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전제를 이미 진리로 받아 들여야 하는데 미리 확정된 결과가 있는 문법적 놀이를 한다고 할 수 있지요. 저는 그와는 반대로 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