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믿음에 익숙해져라. 왜냐하면 모든 좋고 나쁨은 감각에 있는데, 죽으면 감각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음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사실을 제대로 알게 되면, 가사성(可死性)도 즐겁게 된다. 이것은 그러한 앎이 우리에게 무한한 시간의 삶을 보태어주기 때문이 아니라, 불멸에 대한 갈망을 제거시켜주기 때문이다. "죽음은 두려운 일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은, 살아가면서 두려워할 것이 없다. 그러므로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죽을 때 고통스럽기 때문이 아니라, 죽게 된다는 예상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헛소리를 하는 셈이다. 왜냐하면 죽음이 닥쳐왔을 때 고통스럽지 않은데도 죽을 것을 예상해서 미리 고통스러워하는 일은..
T. 정의 내리기, 이름 붙이기의 정의, 이름은 이름으로 환원되는 동일시를 방조하기 때문. 정의내리기, 이름 붙이기는 다양성을 제한하고 맞다 틀리다를 가려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가령 이것은 죽비다라고 정의하면 죽비라는 분별에 고정되어 죽비의 다른 가능성의 면목을 보지 못하게 한다. "이것이 죽비라 함은 죽비가 아니므로 이름이 죽비이다.' [불립문자는 정의 내리기, 이름 붙이기를 피하는 이유] 정의를 내리면 설명이 필요하고 설명은 수용가능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정의를 통해 설명하니 정의 아닌 것을 소외시키는 한계를 지어가야한다. 결국 이해를 넓혀가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게 된다. 정의 내리기는 이름에 대한 동일시, 즉 분별에 집착하는 것이다 글을 쓸 때, 분별을 해체하는 방향..
구조적으로 결정된 체계들 - 인간들 - 은 제한된 방식으로 통제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들을 섭동할 순 있지만 통제할 순 없습니다. 강요는 원리상, 승산이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내 테제는, 선생님이 독재 권력의 개념적 토대를 제거하는 인식론을 발전시켜 왔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 테제를 강력히 지지할 뿐더러, 내가 독재의 개념적 토대들을 파괴할 수 있다는 점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내 작업으로 인해 나는 민주주의에 대한 보다 심도 깊은 이해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민주주의가, 자기존중과 타자들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참여와 협력이 가능할 수 있는 '더불어 살기'의 공간으로서 매일 새롭게 창조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독재가 파괴하는 첫 번째의 것은 한 사람 한사람의 개인의 자기 존중과..
T.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 다만 경청할 뿐. 위로 하려다 보면 되려 상처를 주게 된다. [간섭하지 않는다.]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 다만 경청한다. 진정한 위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경청. 경청은 사랑이다. 2. 자기들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할지를 결정할 수 없다고 깨닫게 된 사람들은, 자기들의 행위들이 갖는 성질이 그들의 지혜의 범위에 달려 있다는 것 역시 깨닫게 됩니다. 치료사들의 지혜란, 편견 없이 경청할 수 있는, 그리고 '개방성과 무간섭'의 태도를 보여줄 수 있는 그들의 능력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는 게 나의 주장입니다. 따라서 관계 속에서 자기를 표현하고자 하는 모든 것은 편견과 개인적 편애에 의해, 그리고 속임수 기술들이나 통제욕망들에 의해 왜곡되지 않고, 그것..
화작이란 무엇인가요 “여러분들의 질문지를 보니 화작(化作)에 대해서 관심이 많네요. 화작이라는 것은 ‘걸림 없이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청소부가 ‘청소하는 것이 특별하다’ 이렇게 생각하고 청소를 할까요? 그냥 청소를 할까요?” “그냥 청소합니다.” “가정주부가 밥을 할 때 ‘밥하는 것이 특별하다’ 이렇게 생각하고 밥을 할까요? 그냥 밥을 할까요? 그냥 밥을 합니다. 농사꾼이 씨 뿌리고 김매면서 ‘특별한 일을 한다’라고 생각하면서 할까요? 그냥 할까요?” “그냥 합니다.” “짐꾼이 짐을 싣고 운반하면서 특별하다고 생각할까요?”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처럼 만약 스님이 ‘스님이다’하는 상(相)을 가지고 있으면 ‘스님이 청소도 하네’, ‘스님이 짐도 운반하네’, ‘스님이 ..
1. 그들은 차이들을 존중할 것이고, 자신들이 진리의 유일한 소유자라고 주장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교제를 즐길 것입니다. 그들은 더불어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차이나는 문화를 만들어 낼 것입니다. 2. 내가 볼 때 핵심 문제는 기대하지 못한 어떤 것이 드러났을 때 우리가 우리의 확실성들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실망스러운 체험들이 꼭 깊은 좌절과 분노로 연결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체험들이 정말 극적으로 새로운 전망들을 열어젖힐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기대들이 충족되지 않았음을 깨닫고, 너무 흥분하지 않고 새로운 방향을 잡기로 결정하는 거죠. (함으로 69) 3. 인과적 설명의 (당신 표현을 빌자면) 구성된 신뢰성을 따르지 않는 삶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우리 이야기를 따라가면 생물학적으로 보아 의사소통에 '정보의 전달'이란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구조접속의 영역에서 행동조정이 나타날 때마다 의사소통이 있다. 이 결론은 충격적으로 들린다면 그 까닭은 의사소통에 대한 가장 인기 있는 비유이자 이른바 의사소통매체가 유행시킨 '도관'의 비유를 좀처럼 의문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비유에 따르면 의사소통이란 어떤 곳에서 생겨서 어던 도선(또는 도관)을 따라 중계되어 다른 곳으로 전달되는 어떤 것이다. 곧 전달되는 어떤 '것'이 있고, 이것은 도관을 따라 중계되는 것 안에 들어 있다. 사람들이 흔히 그림이나 물건, 인쇄된 낱말 따위에 '정보'가 들어 있다고 말한다. 우리 분석에 따르면 이 비유는 처음부터 틀렸다. 왜냐하면 이 생각은 구조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 개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