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기에 번뇌가 있을 때는 깨달음이 없지만, 깨달음은 깨달음에도 머물지 않는 앎이기에 번뇌를 갖고 있는 상태가 있을 수 없습니다. 번뇌가 깨달음이라는 뜻은 번뇌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변해 깨달음이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분별해 갖고 있는 앎이 무상성을 회복할 때, 갖고 있는 분별상에 더 이상 머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알아차리는 마음에 의해 번뇌와 깨달음이 상대하는 분별상으로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곧 번뇌도 번뇌라는 실체를 갖지 않고 진여 자성의 알아차리는 마음 또한 번뇌를 떠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번뇌가 일어나는 순간 번뇌인 줄 알아차릴 수 있으며, 알아차리는 마음에 의해 번뇌가 번뇌로 작용하지 않게 되고 나아가 번뇌의 자성이 없는 줄 체득하게 되므로 번뇌가 있는 그곳에 깨달음이 있을 수 있..
그러므로 깨달음이란 변화의 순간순간에 깨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앎 그 자체의 속성, 곧 머묾 없는 변화가 앎이 된다는 것을 알아 집착하여 갖고 있는 허상을 내려놓고 번뇌를 여의어 함께 아름다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존재의 실상이 이웃 항들과 공감인 줄 알기 때문입니다. 개체로 나타나는 하나의 현상이 스스로를 해체하면서 다른 현상이 되는 것이 이웃 항들과의 공감으로 이루어지는 하나의 현상이라는 것을 보고 안다는 것이지요. 앎의 항상성과 개체의 무상성이 어울려서 항상하지도 않고 무상하지도 않는 것이 무상으로 현상을 나타내고 앎으로 기억을 남기므로 무상성과 항상성이 담보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변화에도 머물 수 없고 항상성에도 머물 수 없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앎의 기억에서 보면 머물 수 있는 것 ..
오직 온갖 이웃 항들과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변하는 그것이야말로 열린 생명계 전부일 뿐입니다. 열린 생명계이기에 어느 순간만이 생명계의 진정한 모습일 수 없으며, 어느 모습만이 생명의 진실을 다 나타낼 수 없습니다. 단 하나의 사건, 사물도 온전한 것입니다. 목표를 향해 이루어가는 과정으로 이해해야하는 과정은 없습니다. 찰나가 완성된 목표며 이미 이루어진 과정입니다. 이것이 법의 특성이며 생명들의 앎과 이룸입니다. 이루어가는 과정으로 원인을 삼고 이루어진 것으로 결과를 삼지만 생명 그 자체는 과정과 결과가 없습니다. T1000.0 : 따로 구할 것이 없다. 과정이 곧 결과이기 때문이다. 과정을 긍정하고 다시 과정의 긍정 그 자체를 긍정하면[긍정의 긍정 즉 이중 긍정하면] 결과는 이미 결과를 떠나서 이미 ..
기억하고 알아차리는 법계 인연이 스스로 시공간을 만들고 있으므로 앎과 이룸이 찰나의 순간에 온전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인연의 무상한 변화가 그 자체로 앎이 되고 이룸이 되면서 동시에 시간을 만들어 기억 속에 남은 앎과 이룸의 현재를 해체하고, 다시 다른 앎과 이룸으로 새로운 현재를 만든다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앎과 이룸 그 자체에 온전히 깨어 있는 한 순간이 이룸 없는 이룸, 곧 머물지 않는 이룸으로 단박에 닦는 것이 되면 , 깨달음 없는 개달음, 곧 이미지로 그릴 수 없는 깨달음으로 단박에 깨닫는 것이 됩니다. 법계의 실상에 계합하는 순간만이 온전히 법계의 앎과 이룸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계합하지 못한 앎과 이룸이라면 온전한 앎과 이룸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점차로 알고 점차로 이룬다는 뜻은..
알아차리는 마음은 법신의 본성인 머묾 없는 지혜를 쓰게 되므로 쓸수록 번뇌가 줄어들지만, 복을 구하는 마음은 복이라는 형상과 이미지를 갖게 되어 구하면 구할수록 인생의 짐만 늘어나게 됩니다. 형상을 갖지도 않고 형상 이미지에 머무르지도 않는 법신의 지혜와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복을 닦는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복을 구하는 마음이 복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그것으로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하나, 이것은 욕망하는 마음만을 붙잡고 있는 것과 같아 욕망을 내려놓지 못하게 하니, 복을 구하는 마음이 번뇌를 이루는 마음이 되고 만다는 것이지요. 복을 구하는 마음이 복을 구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고 구하려는 욕망을 키우는 꼴이 되므로 욕망하는 마음이 마음 밖을 떠돌게되며, 복을 얻었다 할지라도 욕망..
** 그 뜻을 마음에 새기고자 여기 블로그에 인용한다. 출처는 정병조 옮김, 한국불교연구원출판부, 1978. p23. "선지식이여, 무릇 선하다든지 악하든지 하는 생각을 하지 말라, 바로 이러할 때에 어떤 것이 그대의 본래면목인가?" 이것은 혜능이 오조의 법을 얻고 남쪽으로 피신할 때, 의발을 강탈하러 따라온 혜명이라는 스님께 던진 혜능의 말이다. 일반적인 해석방법에 의한담녀 이 구절은 대단히 잘못된 판단임에 틀림없다. 즉 통념적인 계와 정의 해석방법에 대한 비판의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계란 선악을 분별하는 것이요, 정이란 마음을 한 곳에 집중시킨다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여기에 부연하여 설명되는 신회의 말을 다시 인용해 본다. "마음의 시비가 있는가." "없다." "마음의 가고 옴이 있는가." "없..
만약 자기 성품을 깨달으면 깨달음도 열반도 세우지 않으며, 또한 해탈했다는 생각도 세우지 않아서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어야 만법을 세우느니라. 이 뜻을 알면 이것이 곧 부처님의 몸이요, 깨달음이요, 열반이요, 또한 해탈지견이니라. 견성한 사람은 세워도 되고 안세워도 되며, 가고 옴이 자유로워 막힘이 없고, 걸림이 없어서 경우에 따라 작용하고, 말에 응하여 대답한다. 널리 화신을 나타내지만 자성을 떠나지 않으므로 곧 자재한 신통과 유희삼매를 얻으니 그것을 이름하여 견성이라 하느니라. 걸림이 없어서 경우에 따라 작용하고. 이 말은 법성게에 나오는 불수자성 수연성을 떠올리게 하는데, 스스로의 성품을 지키지 않고, 인연을 따라 이룬다에서 "인연을 따라 이룬다"와 "경우에 따라 작용하고"를 겹쳐 생각해보면 좋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