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 없는 인연 자체의 변화에서 온갖 차별이 나오므로 차별된 낱낱은 인연 전체의 무게를 담고 있는 차별이 되고, 인연을 모두 담고 있는 차별이기에 인연의 각성에서 보면 차별된 그 모습 그대로가 차별을 떠난 실상이 됩니다. 차별 없는 자리에서 온갖 차별이 나오고, 차별이 그 모습 그대로 차별 없는 불성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 정화스님, p21 T1000.0 : "차별 없는 인연 자체의 변화에서 온갖 차별이 나오므로" 스피노자의 에선 기쁨의 감정을 작은 완전성에서 큰 완전성으로 이행으로, 슬픔을 큰 완전성에서 작은 완전성으로의 이행으로 정의하는데, 기쁨과 슬픔의 차별은 차별 없는 인연 자체의 변화에서 나오기 때문에 큰 완전성과 작은 완전성의 차별로 나온다. 스피노자의 용어을 쓰자면 "양태"란 차별 ..
그러므로 공부하는 사람은 오고 가는 대상에 자신의 욕망과 이미지를 결부시켜 파악하는 분별을 내려놓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러면 분별된 이미지가 알아차리는 마음에 비친다고 할지라도 그 이미지의 흐름을 잡지 않기 때문에, 곧 자신의 욕망 등을 투사하여 보려는 속성을 내려놓았기 때문에, 이미지를 갖되(相) 이미지 스스로가 이미지를 해체시켜 무상하게 변해가는 모습(無相)을 보고 이해할 수 있으며(正見), 욕계의 욕망 등을 좇지 않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正思惟). 이렇게 형성된 바른 이해와 생각을 생각생각으로 이어가면 욕망을 충족시키던 대상을 통해 얻게 되는 기쁨과는 다른 수승한 기쁨이 일어납니다. 그리하여 밖을 좇던 마음이 안으로 마음 집중을 통해 성취된 수승한 기쁜을 향유하다가, 수승한 기쁨조차 쉰 고요한..
그러므로 부처가 되어야 중생이 아닌 듯하지만, 애초부터 중생과 부처라고 할 것이 따로 없으니, 중생 그대로가 부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부처라는 특별한 모습으로 변해야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뭇 생명(衆生) 모두가 우주 법계의 역사를 담아 지금의 모습으로 생명 활동을 하기에 하나의 생명이면서 여러(衆) 생애(生)의 생명이 되기 때문이며, 인연으로 어울린 생명관계에 의해서 하나의 생명도 그 모습 그대로 뭇(衆) 생명(生)이 되기 때문입니다. 곧 생명마다 자신의 모습을 바꾸지 않고도 시방 삼세의 모든 생명을 담아 자신이 되는 것이니, 생명은 원래부터 그 모습 그대로 특별합니다. 특별한 존재 가치를 구현해야 자신이 생명으로서 존재 이유를 갖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한 존재 이유야말로 만들어진 이미지로 자..
인연으로 한 모습이면서 온갖 다름으로 인연을 드러내니, 같은 것도 없고 다른 것도 없습니다. 모습을 드러내면서 빈 모습이 되고, 빈 모습이 인연따라 모습을 드러내므로 모습(相)도 빈 모습(空相)도 자체만으로의 모습(自相)이 없습니다. 이것이 뭇 생명들의 실상입니다. 인연에 수순하는 생명의 흐름이 온갖 인연을 다 담아 찰나마다 다른 모습을 드러내 머물지 않는 생명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T1000.0 : 같은 것도 없고, 즉 전찰나와 후찰나의 인연이 달라 그 차이로 앎이 되는데, 즉 같은 것도 없고 다른 것도 없습니다, 즉 전찰라와 후찰라의 앎이 서로 다르면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은 달라진 바가 없고. 요컨대 미세하게 보면 하나하나 같은 것이 없고 크게 보면 하나하나 다른 것이 없는 한 흐름에서의 중도.
삶의 순간들은 무상한 변하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무상이란 두찰나를 이어 동일한 모습을 유지하지 않는다는 뜻이니, 순간이라고도 할 수 없는 찰나마다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 삶입니다. 삶은 연속되지 않는 단 한 순간의 삶입니다. 사는 주체가 삶의 변화를 타고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상한 한 순간이 삶의 전존재를 드러내는 한 순간입니다. 또한 순간마다의 다름이 앎이 되므로 앎만이 삶의 전부라고 할 수 있으며, 순간이 존재의 모든 것을 다 드러내므로 시간을 이어가면서 완성되어가는 삶도 없습니다. 앎의 한 순간들이 그 자체로 온전한 삶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변화와 앎 또한 인연의 순간들이 만들어 내는 것과 같으므로 삶을 관통하면서 변하지 않는 어떤 것이 변하거나 아는 것일 수도 없습니다. 삶은 찰나마다 온..
어디에도 진실이 없으니 진실을 보려하지 말라 진실을 보았다고 하면 보는 것이 도리어 진실이 아니네 자기에게 진실이 있을 수 있다면 거짓을 떠난 그 마음이 진실이니 자기 마음에서 거짓을 보내지 못하면 진실이 없으리니 어디에 진실이 있을까 유정은 움직일 줄 알고 무정은 움직일 줄 모르니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도를 닦는다고 하면 움직이지 않는 무정과 같으리 참으로 움직이지 않음을 본다는 것은 움직임 그 자체에 움직이지 않음이 있는 것을 보는 것이니 움직이지 않음이 움직이지 않음에만 머문다면 정情도 없고 부처 될 종자도 없으리라 갖가지 모양들을 잘 분별하나 근본은 움직이지 않는 것이니 깨우쳐 이같이 볼 수 있다면 잘 분별해 보는 것, 그것이 곧 진여의 작용이다. 도를 배우는 모든 이들에게 고하나니 부지런히 마음..
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단상이 2가지 있었는데, 하나는 신수가 게송을 지을때 고민하는 모습이 세잌스피어의 햄릿을 떠오르게 한 것과 또하나는 에 나오는 대화들을 세잌스피어의 희곡처럼 대사와 지문으로 편집해 문학작품처럼 만들어도 어울릴 것같다는 생각이 하곤 했는데, 이번에 정화스님이 풀어쓴 을 보니 꼭 그와 같이 대사와 지문으로 되어 있어 놀랍고 반가웠다. 더욱이 우리말 문체가 아름답고 리듬이 살아 숨쉬듯 편하여 손꼽을 책이 아닌가 하는데, 이런 저런 이유로 그 중에서 내가 감명받았던 대목을 여기에 통채로 새겨본다. 을 맨처음 접하면서 크게 놀란 것이 육조 혜능이 글자를 모른는 일자무식 나무꾼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읽기도 어렵다는 경전을 아예 읽을 수도 없는 분이 육조가 되어 경이라고 칭송하는 이름이 붙여진 을..
밝게 알아차리는 마음의 세 가지 작용인 계정혜 삼학 또한 이와 같습니다. 법계의 인연상들이 순간순간 모습을 바꿔가면서 인연을 다 담아 낼 수 있는 것은 인연이 된 마음이 어느 순간에도 밝게 깨어 있기 때문이며(慧), 밝게 깨어 있는 인연의 마음은 인연의 변화를 온전히 받아들이면서 인연이 되므로 인연의 삶을 의심하지 않으며(戒), 인연의 흐름에 의해 마음이 움직이거나 어지럽게 디지 않으면서 인연의 흐름에 수순하게 됩니다(定). 이런 까닭에 어느 것에도 머묾 없는 반야의 지혜로 인연의 공성을 잘 알아차린다면, 분별된 이미지가 실재가 아닌 줄 알게 되므로 집착하는 마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분별상에 대한 집착이 없으니 인연의 흐름이 생명의 온전한 표현이라는 것에 대하여 의심이 있을 수 없으며, 분별상을 갖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