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말씀드렸듯이 눈과 형색이 만나 눈의 마음(眼識)이 일어나고, 귀와 소리가 만나 귀의 마음(耳識)이 일어나며, 코와 향기가 만나 코와 만나 코의 마음(鼻識)이 일어나며, 혀와 맛이 만나 혀의 마음(舌識)이 일어나며, 몸과 감촉된 것이 만나 몸의 마음(身識)이 일어나며, '생각의 도구인 분별된 이미지(法)르 만들어 언어화하는 의意와 '만들어 기억하여 갖고 있는 이미지(法)'가 만나 '의意의 마음인 의식意識'이 일어나는데, 이 가운데 '안다는 사실'을 제외한 어떤 것도 변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이 말은 변하는 것이 아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있어 무엇을 아는 것 같지만, 의식하는 마음 또한 인연에 의해 만들어진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오직 인연의 흐름인 무상한 변화야말로 만들어진 것이면서 동시..
1. '허망한 생각이 없다(無念)'는 것은 모든 것을 보되 어떤 것에도 집착이 없으며 어느 곳에나 있되 어느 곳에도 집착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항상 마음 그자체를 청정히 하여 번뇌를 생기게하는 도적과 같은 눈,귀,코,혀,몸,마음의 6근으로 하여금 지각의 문을 달려 나가 여섯 가지 경계와 만나게 하되, 경계를 제거하지도 않고 경계에 물들지도 않아 오고 감에 자유롭습니다. - p137 2. 이것은 물론 의식이 환상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의식의 본성은, 결과를을 받아들이되 그 원인들을 알지 못하는데 있다. 원인들의 질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연장 속의 각 신체, 사유 속의 각 관념과 각 정신은, 이 신체의 부분들, 이 관념의 부분들을 포섭하는 독특한 관계들에 의해 구성된다. 한 신체가 다른 신체..
그러나 법을 전수할 때는 예부터 해왔듯 말없이 전수해야 하지만, 큰 서원을 세우고 깨달음을 위한 수행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당부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이와 같은 견해에 동의하지도 않고 그렇게 할 뜻도 없다면, 그곳에서는 쓸데없이 법에 대해서 이야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은 옛 어른의 뜻을 훼손할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누구에게도 이익이 없습니다. p146 T1000.0 : 법을 말없이 전하는 이유는 스스로 깨닫도록 하게 함이겠지만 내 생각에 깊은 뜻은 이렇다. 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설명하고 가르치는 것은 듣는 이가 원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 그러나 듣는 이가 원하지 않아도 불법은 전할 수 있는데 바로 말이 아닌 마음으로 전하..
법法이라는 개념은 언어 표상에 맞는 동일한 보편성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어느 것(法)을 지칭하고 있는데, 무상 속에서 다름을 분별하여 기억하는 마음의 상속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다른 모습들(一切法)이 그 모습 그대로 인정될 수 있는 근거가 있다는 뜻이면서도 그 모습들이 마음의 나타남이라는 데서는 어느 것도 제 특성만을 고집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전 찰나의 법을 허물면서 후찰나의 법이 되기에 기억과 동시에 기억을 떠나 법이 되어 법 스스로 법이라는 개념을 부정하면서 법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형상(相)으로 드러난 마음이지만 그 형상의 보편성(相)이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형상을 부정할 수밖에 없어 '모양 없음(無相)'이라고 하지만, 모양 없음이라는 보편상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모양 없음도 부..
번뇌와 깨달음이 하나의 작용 속에 함께 있는 것과 같아 깨달음이 일어나면 번뇌가 없어지는 것과 같고 번뇌가 작용하면 깨달음이 없는 것과 같으나, 마음 작용 하나하나는 그 자체로 삶과 앎의 인연을 전체로 드러내고 있으므로, 번뇌일 때는 번뇌만 있고 깨달을 때는 깨달음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앎의 속성을 바로 보고 이해한다면 번뇌가 곧 깨달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번뇌를 불러일으키는 마음작용이 일어나는 순간에도 온전히 깨어 있게 되면 번뇌를 아는 것이 아니라, 자각된 깨달음만 있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마음 하나 살펴 일어나고 사라지는 무상과 무상이 앎이 되는 인연을 온전히 자각한다면, 한없는 번뇌 또한 깨달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 정화스님 T1000.0 : 은 마음이야말로 '소의경전'이라고 한다. 마음..
혜능 스님의 게송이 나타내고 있는 뜻을 신수 스님은 알 수 없었다고 단경에서는 이야기하고 있지만, 신수 스님께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수행자가 인연의 각성을 자각하지 못한다고 하면 '청정'이라든가 '한 물건이 없다'라든가 하는 것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곧 인연의 각성을 자각하지 못하는 한, 밝은 거울 같은 마음이 먼지에 덮여 있는 것과 같으니, 부지런히 수행하여 번뇌를 만드는 마음씀을 털어내고 청정한 마음과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면 모든 것이 연기의 공성에서 청정하지 않는 것이 없으나, 수행자가 이것을 체험하지 못했다면 청정성을 보지 못하게 하는 분별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강조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한 물건도 없다'는 뜻을 바르게 알지 못하면 허무에 빠지거..
의 32번째 대목을 보면 금강반야바라밀을 수행하는 수행자는 "인연 따라 만들어진 모든 것들을 마치 꿈,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갯불과 같다고 보아야 한다."라고 공성空性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는 것이 인연 따라 잠시도 머묾 없이 변하는 모든 것의 실상인 공성을 보는 것이며, 공성을 온전히 보고 이해하면 반야의 지혜가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반야부 경전 전편을 관통하고 있는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알아차려야 하는 까닭은 어느 것 하나 두 찰나를 연속하여 동일한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고 변하므로 '있다(有)'라고도 할 수 없지만, 찰나마다 다른 모습으로 앎이 상속되니 '없다(無)'라고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앎이 상속되는 것에서 보면 항상 있는 것 같고, 찰나의 다름이 앎이..
따라서 마음을 그쳐(止) 흐름을 본다(觀)는 것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앎이 대상들을 그저(止) 보면서(觀) 앎에 깨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수행자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러다 보면 변화가 앎이 되고, 앎이 변화로 자신을 드러내는 현재를 보게 되는 것이지요.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리는 마음이 인연의 변화 밖에서 인연을 살펴 아는 것이 아니라, 알아차리는 마음 그 자체가 인연의 본질인 줄 분명하게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청정한 몸과 마음이 따로 있고 그 위에 번뇌라는 먼지가 묻어 있는 것처럼 몸과 마음을 이해한다면, 몸과 마음과 청정한 앎의 모습을 제대로 본 것이 아닙니다. - 정화스님, p30 T1000.0 : 알아차리는 수행을 할때 마음을 관찰하는 입장이 되기때문에, 관찰하는 마음과 관찰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