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고 할 게 없는 고로 나의 것도 없다. 실체가 있어야 소유할 것인데 그것이 없으니 소유는 불가능하다. 다만 소유라는 분별이 있을 뿐. 해서 이 분별은 집착할 것이 아니다. 본래 정해진 것이 없으므로 잡히지 않으며 얻을 것도 없다. 분별은 그냥 문화이자 관습일 뿐 법도 아니고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곧 시들 꽃에 누가 집착하겠는가? 또한 아름다운 꽃을 저버리겠는가? 모든 것은 변한다. 내가 보기에 가치를 둘 것은 변하는 것의 소유가 아니라 관리다. 관리는 집착하지 않으며 소홀히 해서도 안된다.
1. 노동을 하게 되면서, 죽음을 의식하게 되면서, 부끄럼 없이 행하던 성행위를 부끄럽게 여기게 되면서 인간은 동물성을 벗어난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동류로 간주할 수 있는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인간은 동굴 벽화 시대 (이때는 후기 구석기 시대이다)의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때의 인간만해도 이미 종교성을 획득한 인간이었다. (에로티즘 33) 2. 첫 번째 강의는 창세기와 원죄에 대해 다루었습니다. 나는 사과를 따 먹고 그것을 아담에게 준 이브가 하나의 사례로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신의 계율에 맞선 그녀의 반란이 인간의 자기인식과 책임 있는 행위를 위한, 낙원 - 자기인식이 없는 세계 - 으로부터의 추방을 위한 토대를 마련했던 것입니다. (있음에..
연기법에서는 세상 모든 존재를 사건의 흐름으로 본다. 연기법에 의하면 세상에 실체를 가진 존재는 없다. 세상은 사건의 집합이고 사건의 흐름일 뿐이다. 다만 인과관계로 맺어진 사건들이 일정한 시간 동안 지속되어 하나의 흐름, 즉 사건의 흐름을 형성하면 사람들은 이 '사건의 흐름;을 어떤 존재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연기법에 의하면 미시세계의 존재도 거시 세계의 존재도 그저 사건의 집합이고 사건의 흐름일 뿐이니 여기서 어느 것이 허깨비이고 어느 것이 더 실제적인 존재인가 하고 논할 바가 못된다. 실제적인 존재라고 본다면 그것은 범부의 착각일 뿐이다. 범부의 착각이라는 것은 범부의 마음이 범부가 보는 세상을 만들었다는 것으로서 폰 노이만의 주장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미시세계도 거시세계도 '공'일 뿐이다..
상호의존성의 예로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들 수 있다. 부분이 모여 전체를 이루지만 전체 또한 부분의 성질을 결정한다. 단어와 문장의 관계가 바로 그렇다. '길'이라는 한 개의 낱말을 생각해보자. 단어 하나하나는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이기 때문에 단어만 보고서는 이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다. "달이 밝으니 가는 '길'이 훤하다"라고 할 때와 "그 사람은 지금가지 바른 '길'을 걸어왔다"또 "그 사람 앞 '길'이 훤하다"라고 할 때 '길'이라는 단어가 갖는 뜻은 셋 다 다르다. 문장이 단어의 뜻을 고정시키는 것이다. 사람과 사회 및 문화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모여 사회를 이루고 문화가 생기는 것이짐나 사회와 문화가 사람의 행동을 결정짓기도 한다. 사물이 다른 것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그 의미..
이름에 가려져 너의 무상한 흐름을 보지못하니 이름을 지우고 그 흐름을 즐겨보겠어. 정의내리지않고.
1. 내 삶에서의 폭력, 그러니까 나를 둘러쌌던 폭력은 그림에서의 폭력과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물감의 폭력성은 전쟁의 폭력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실재의 폭력성 자체를 새롭게 만들려는 시도와 관계가 있죠. 그리고 실재의 폭력성은 장미 등이 폭력적이라고 말할 때 의미하는 단순한 폭력성일 뿐만 아니라 물감을 통해서만 전달될 수 있는, 이미지 자체에 내포된 암시의 폭력성이기도 합니다. 테이블 건너편의 당신을 볼 때 나는 당신뿐만 아니라 당신으로부터 발산되는 전체를 봅니다. 그것은 인간성을 비롯한 모든 측면과 관계가 있습니다. 내가 초상화 작업에서 하려는 것처럼 그 폭력성을 그림에 펼치는 것은 그것이 물감을 통해 폭력적으로 보일 거라는 점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거의 언제나 장막을 두른 채 살아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