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는 자본주의 체제에 있어 다수결의 원칙 같은 것이 아닌가. 민주주의와 다수결의 원칙의 관계처럼 자본주의 구성원들의 이해충돌에 대한 평화협정으로, 소유를 인정한다. 소유를 다수가 인정할 때, 실재적이다. 일본이 독도가 자기내 땅라고 국제사회의 다수를 향해 공을 들이듯이. 소유는 사회 구성원들의 욕망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존중하는 시스템이다. 하지만 다르다는 것이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로 혼동될 때 소유는 욕망에서 권력[특권]으로 변모한다. 소유는 소유다. 욕망이 권력으로 막아 설 때 소유의 그림자 소외가 생긴다. 욕망이냐 권력이냐 그것이 문제다.
1. 내가 다 완전한 열반에 들게 유발하리라. 이와 같이 한량이 없고 수가 없고 가없는 중생을 유발하되 실로 제도를 받은 자가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만일 유발자가 이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다면 그는 유발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2. 정말로 보는 사람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그림을 그립니까? 나는 나 자신을 위해 그림을 그립니다. 그것 말고 달리 무엇을 위해 그리겠습니까? 보는 사람을 위한 작업은 어떻게 할 수 있는 겁니까? 보는 사람이 원하는 것이 무엇일지 상상하는 겁니까? 나는 나 말고는 그 누구도 흥분시키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내 작품을 좋아해 주면 나는 언제나 놀랍니다. 내가 몰두하는 일을 통해 생활을 할 수 있어서 나는 아주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사람들이 말하..
1. 이 땅은 내가 소유주입니다. 내 소유가 분명하게 명시되어 향유할 권리를 보장받으며 나의 인감증명도장이 보증합니다. 만일 도장이 없으면 누구의 소유인가요? 아~, 도장의 의미는 소유 보다는 선언 같은거죠. 정전선언. 아마 무소유가 사랑받는 것도 사람들의 무의식적 반응일지도 모르죠. 전쟁에 반하는. 2. 사실 여기는 나의 소유지입니다. 하지만 나는 주께서 잠시 내게 맡겨놓은 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땅을 교회 부지로 기부해 많은 사람과 향유해도 좋을 거 같아요. 3. 설악산은 아시다시피 국립공원이라 누구나 향유할 수 있어요. 말하자면 모두의 소유이면서 누구의 소유도 아닙니다.
각자의 체험으로 알 수 있듯이 욕망하는 대상은 욕망을 유발할 수 있어도 욕망이 일어나게 결정할 수는 없어요. 가령 음식은 먹고 싶은 욕망을 유발할 수 있어도 먹고 싶은 욕망이 일어나게 결정할 순 없죠. 음식이 앞에 있어도 먹고 싶지 않을 때를 항상 체험하죠. 욕망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는 아무도 몰라요. 누가 알겠어요. 우리는 다만 욕망할 뿐입니다. 내가 보기에, "욕망은 결핍이다"는 뉴스는 가짜뉴스에요. 욕망이 우리 앞에 펼쳐 보이는 것을 우리는 욕망합니다. 끊임없이 생산합니다. 불가사의하고 놀랍고 기적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