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호의존성의 예로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들 수 있다. 부분이 모여 전체를 이루지만 전체 또한 부분의 성질을 결정한다. 단어와 문장의 관계가 바로 그렇다. '길'이라는 한 개의 낱말을 생각해보자. 단어 하나하나는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이기 때문에 단어만 보고서는 이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다. "달이 밝으니 가는 '길'이 훤하다"라고 할 때와 "그 사람은 지금가지 바른 '길'을 걸어왔다"또 "그 사람 앞 '길'이 훤하다"라고 할 때 '길'이라는 단어가 갖는 뜻은 셋 다 다르다. 문장이 단어의 뜻을 고정시키는 것이다. 사람과 사회 및 문화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모여 사회를 이루고 문화가 생기는 것이짐나 사회와 문화가 사람의 행동을 결정짓기도 한다. 사물이 다른 것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그 의미..
이름에 가려져 너의 무상한 흐름을 보지못하니 이름을 지우고 그 흐름을 즐겨보겠어. 정의내리지않고.
1. 내 삶에서의 폭력, 그러니까 나를 둘러쌌던 폭력은 그림에서의 폭력과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물감의 폭력성은 전쟁의 폭력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실재의 폭력성 자체를 새롭게 만들려는 시도와 관계가 있죠. 그리고 실재의 폭력성은 장미 등이 폭력적이라고 말할 때 의미하는 단순한 폭력성일 뿐만 아니라 물감을 통해서만 전달될 수 있는, 이미지 자체에 내포된 암시의 폭력성이기도 합니다. 테이블 건너편의 당신을 볼 때 나는 당신뿐만 아니라 당신으로부터 발산되는 전체를 봅니다. 그것은 인간성을 비롯한 모든 측면과 관계가 있습니다. 내가 초상화 작업에서 하려는 것처럼 그 폭력성을 그림에 펼치는 것은 그것이 물감을 통해 폭력적으로 보일 거라는 점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거의 언제나 장막을 두른 채 살아갑니다. ..
보살은 자유롭다. 입는 옷이 브랜드인지 브랜드 아닌지를 분별하지 않는다면 둘 중 하나를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마음도 일어나지 않는다. 보살은 고급양복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기에 고급양복을 입을 수도 있고, 안 입을 수도 있다. 인연을 따라 입을지 안 입을지를 선택한다. 고급양복을 입고, 안 입고가 자유롭다. 비싼 고급차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만일 스님이 비싼 고급차를 타는 것은 인연에 안맞다. 그가 말하는 법문과 그의 삶이 일치하지 않는다. 우리 중생은 금방 알아차린다. 보살은 검소하다[자유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