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유기체를 해체하는 것은 의미생성과 주체화라는 다른 두 지층을 해체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유기체가 몸체에 들러붙어 있듯이 의미생성은 영혼에 들러붙어 있다. 그래서 이들 어느 것으로부터도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주체, 우리를 지배적인 현실 속에 고착시키고 고정시키는 주체화의 점들로부터 우리는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의식을 탐구 수단으로 만들려면 의식을 주체에서 떼어내어야 하고, 무의식을 진정한 생산으로 만들려면 이것을 의미생성과 해석에서 떼어내야 하는데, 분명 이것은 몸체를 유기체에서 떼어내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이 세 영역에 공통되는 기예(art)가 신중함이다. 유기체를 해체할 때 죽음 근처에까지 가게되는 수도 있고, 의미생성과 예속을 벗어 던질 때는 허위나 환영이나 환각이나 심리..
내가 보기에 예쁘다. 오직 모를 뿐. "요하네스 뮐러가 무엇을 관찰했나요? 여러 가지 감각의 신경들은 항상 그에 상응하는 느낌들, 예를 들어 빛, 소리, 압력 등을 불러일으키는데 그는 이러한 일이 그런 느낌을 초래하는 자극의 물리적 속성과는 무관하게 진행된다는 점을 확인했습니다. 우리 감각이 원래 그대로의 실재를 반영하지 않는다고요? 그래요.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우리는 결코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이라고는 자극을 받은 우리의 감각이 우리 앞에 펼쳐내 보이는 것뿐입니다. 인식의 입구에서 (인식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소위 세계의 심부름꾼들은 (세계의 다양한 모습들은) 그들 자신의 특별한 속성들을 없애 버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연관하여 오늘날은 자극의 무차별적 부호화가 얘기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것일 뿐. 좋고 나쁨이 그것에 없다. 내가 보기에 좋고, 나쁘다. "어떤 사람의 진정한 지혜는 영속적인 자기 고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찰의 역량에, (특정한 상황들을 정확하게 지각해내는 것을 방해하는) 이러저러한 신념들을 기꺼이 버릴 수 있는 자발성에 있다는 것이 내 견해입니다. 현명한 사람은 늘 자기 자신을 관찰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물에 집착하지도 않습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해야만 하는가를 지시하고 있는 궁극적 진리에 인도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p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