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망분별 하니까 사는 것이 너무나도 허망한 듯 보이지만 그 허망분별이 보일때 비로서 온전한 생명활동을 하는 것이다. 왜 완벽한 깨달음을 이룬 후에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 허망분별이다. 허망분별은 원성실성 다음에 나온다. 순서를 말할때 변계소집성을 말하고 의타기성을 말하고 원성실성을 말하는데 실재로 살면서 허망분별이 완벽하니 이해되어 있고, 이해될 뿐 아니라 허망분별을 철저히 사는 때는 원성실성을 완전히 경험하고 나서일때이다. 그것에 의미는 허망분별해야 부처님께서도 일체 인연처에서도 자기 삶을 고집하지 않고 망향관계에서 연기법을 드러내서 삶을 안온하게 만드는 역활을 한다. 만약 부처님께 삶에 자기 특성이 있어서 자기 특성이 있다고 한다면 다른 사람과 만나는 과정에서 자기 삶을 주장하게 되면 두 관계의 삶속..
중도는 색과 공 사이의 진동이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실재로는 색즉시공 또는 공즉시색에서의 진동이다. 요컨대, 모든 생명체는 다 다른 모습을 하고 한 생명으로 있다. 스피노자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모두 실체의 양태이며 이 양태들은 동시에 한 실체이다. 모든 양태들은 한 실체가 무한히 펼쳐진[변용된] 것이며 따라서 실체의 양태와 양태가 구분되지 않은채로 구분되어 있는데 여기서 구분되지 않은 채로 구분되어 있는 것이 공즉시색이며 우리는 이 속에서 공에도 머물지 않고 색에도 머물지 않는 진동의 중도를 따라야한다.
기신론에는 범부가 어제 한 일에 대해서 잘못을 알고 오늘 그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는 것을 凡夫覺이라고 이름하면서 동시에 不覺이라고 한다. 그것은 그 覺의 본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은 좋은 의미에서 不覺이고 좋지 않은 의미에 있어서는 더욱 말할 것도 없다. 그 모든 것들이 근원적으로 我와 法이라고 하는 것을 허구로 세워놓고 그것에 따라서 만들어진 이미지에 맞춰서 흘러가게 두면 우리에게 좋은 삶이 오지 않는다. 이와 같이 가지가지 상의 전환은 우리에게 내재적으로 전재해서 변화가 오는 것인데 즉 피해의식 속에 識에 의해서 변한 바다. 피해의식 또 차능변무상. 能變이라는 것은 능동적으로 삶을 변화시키는 힘이다. 근데 자각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요. 능동적으로 욕심내고..
일본 애니메이션 를 보았다. 늑대아이인 유키와 아메. 그리고 그들의 엄마 하나. 엄마에게 아이들의 늑대 본성은 버려야할 것도 들어내야할 것도 아니다. 엄마가 늑대아빠와 예쁘게 잘 산 것처럼 아이들이 잘 크는 게 가장 큰 관심이다. 영화를 보면서 어느 누구와도[비록 늑대인간이라도] 어떤 소외도 없이 살 수 있음을 느꼈다. 늑대 종자를 타고난 두아이인 유키와 아메는 도시에 살면 거북스런 본능이지만 산중으로 이사를 가니 물 만난 고기처럼 활기차다. 이들의 늑대성은 마을이 산짐승 때문에 농사를 망쳤을때 유일하게 감자농사를 풍년으로 이끈 요인이었다. 즉 늑대아이들의 본성이 어떤 환경과 조우하느냐에 따라 좋은 것도 되고 나쁜 것도 된다. 영화 중에 흥미를 끄는 장면은 유키가 학교에 들어가 늑대본성을 드러내지않기 위..
마뚜라나는 언어를 행위의 조정의 조정이 일어날 때 출현한다고 말한다. 또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는 언어놀이라고 말한다. 이 둘은 회통하는 언어 관점이라 생각된다. 간단히 "행위의 조정의 조정"을 생각해보면 우리가 한글의 기억자를 배울때 가로로 한획을 긋도록 하는 것이 행위의 조정이고 다음으로 가로로 긋도록 하는 것이 행위의 조정의 조정이다. 이렇게 할 때 "ㄱ"이라는 언어가 출현한다. 마찬가지로 "ㅣ"라는 모음 역시 가로로 한획을 긋는 행위의 조정이 있은 후 아무 조정도 하지 않는 조정으로 언어를 출현시키는 것이다. 이는 언어가 놀이라는 비트겐슈타인의 후기철학과 같은 맥락이다. 이렇게 행위의 조정의 조정을 통해 언어[언어 게임]를 출현시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주목하듯이 이런 식으로 일상의 언어는 무수히..
조건이 다르면, 배치가 달라지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독은 어떤 것도 그자체로는 독이 아닌데, 독이 독이 되려면 그것에 반응하는 분자적 배치를 만나야한다. 사람에게 독인 것이 뱀에게는 독이 안되는 것은 신체의 분자적 배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자체로 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독에 반응하는 신체에서 독은 제1원인이 될 수 없다. 원인은 독에 반응하는 분자적 배치에 있다. 독이 제1원인이라면 어떤 분자적 배치에도 독이 되야하는데 그렇지가 않다. 그런 것은 없다. 화를 내는 신체 또한 마찬가지다. 욕이 나를 화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욕이 화가 나도록 반응하는 분자적 배치와 배치를 이룰 때 화가 난다. 화가 나게한 원인은 욕이 아니다. 욕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수행은 우리의 몸맘을 바꾼다. 요컨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