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원인들의 무한한 연쇄로 이루어진 흐름이고 이 흐름은 생성과 소멸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흐름이다. 즉 삶은 연기의 흐름이고 우리는 흐름을 앎의 흐름으로 인식한다. 순간순간이 앎의 흐름이며 의식의 흐름[흐름의 의식이라 해야 더 정확하지만]이다. 가령 무슨 일을 접할 때 "힘들어도 재밌어요"라고 하는 것은 몰랐던 앎을 경험하는 것으로 새로운 재미[기쁨]가 새로운 앎으로 인식되고 그 앎으로 인해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새로운 세계는 편견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 볼 때 열리는 앎의 장이며 삶은 자연히 앎의 장이 무한히 확장되는 방향으로 흐르는데 단지 우리가 그것을 알지 못할 뿐이다. 그러니 순간순간 깨어있으라,한다.
생각을 관찰할 수 있습니까? 여기서 다시 한 번 강조해야 할 것은 내가 있어서 생각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생각의 흐름[앎] 속에 나와 대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앎]이 이어져 가면서 순간순간 자신과 대상의 전체가 변하면서 흐릅니다. 이것이 앎의 흐름이며, 우리의 삶은 매순간 앎 밖에 없습니다. '생각이 바로 앎'으로서, 무엇이 생각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알고 관찰되는 흐름'이 있습니다. 관찰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관찰자가 출현하는 흐름의 배치가 있는 것이구나. 가령 마음이 괴로울때 이 괴로움을 일으키는 배치가 왜 괴로운 지를 보게하는 관찰자를 출현시킨다[생각(앎)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 관찰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계기가 된다. 그러고보니 흐름이 바로 흐름을 저절로 알고 관찰되는 ..
마뚜라나 내 주장은 이렇습니다. '우리의 행위 순환[재귀]적인 조정, 즉 행위의 조정의 조정에서의 흐름과 마주칠 때마다, 우리는 새로운 것, 즉 언어가 출현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언어가 출현할 때 대상들이 출현합니다. 예컨대 택시 같은 것 말입니다. 택시란 무엇입니까?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행위의 두 번째의 조정(첫 번째 순환[재귀])에 의해 조정을 이룬 행위의 조정으로서의 승객을 태우는 수송 및 운전은 행위의 세 번째 조정(두 번째 순환[재귀]) 속에서 택시라고 "이름 붙여져"나타나는 행위의 그러한 배치가 된다.' 이것은 (택시가 수송[실어나름]을 모호하게 하는 것처럼) 대상들이 자기들이 조정하는 행위를 모호하게 하는 '행위의 조정들의 조정'으로서 출현한다는 것을 의미합니..
에 나오는 차제걸이는, 부처님이 천여명의 제자들과 줄지어 걸식을 하신 것은 그 자체로 수행이었다. 걸식을 하는데 마음에 아무 장애가 일어나지 않아야하며 이는 뻔뻔함과는 무관한데, 왜냐하면 이들은 가난한 집이나 부자집이나 편한 집이나 불편한 집이나 어떤 구분도 두지않고 차례로 딱 7개의 집을 들르기 때문이다. 아무 말도 없이 발우를 들고 서있다가 음식을 주면 주는데로, 없으면 없는대로 그날의 형편따라 살아간다. 마음에 차별을 두지 않을 뿐 아니라 마음에 아무 차별이 일어나지 않도록 정진하는 일상의 수행. [차제걸이] 1. 차별을 두지 않는 것으론 부족하다. [차례로 간다][욕계] 2. 차별이 일어나도 아무런 장애가 없다. [일곱 집만 간다][색계] 3. 차별이 일어나지 않는다. [차제걸이 수행의 완성][무..
흐르는 물처럼
기쁨과 노여움과 슬픔과 즐거움과 걱정과 탄식과 변덕과 고집스러움 및 경박함과 방탕함과 뽐냄과 허세 같은 사람의 마음이, 음악이 공간에서 생겨나고 버섯이 수증기로 말미암아 자라나는 것처럼, 밤낮으로 우리 앞에 서로 엇바퀴어 나타나지만, 그러나 그 싹이 튼 곳을 알지 못한다. 아아, 안타까워라! 아침 저녁으로 이것들이 나타남은 그 근원이 있어서 생기는 것이 아닌가! 그것들이 아니면 나도 존재할 수 없고, 내가 아니면 그것들도 의지할 곳이 없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또한 가까울 것이로되 그렇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한다. 혹 참된 주재자가 있을 법도 하지만 특별한 그 증거를 잡아낼 수는 없다. 그것의 작용에 대해서는 이미 믿고 있다 하더라도 그 형체는 볼 수가 없다. 그러한 실정은 존재하나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