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수자성 수연성不守自性 隨緣成' 스스로의 자성을 지키지 않고, 즉 좋고[탐심] 싫음[진심]을 지키지 않고 인연을 따라 이룬다.는 그 의미를 알아 행하려고 애쓰다 좀더 이해가 명확해진 느낌을 받았다. 사수捨受란 말을 배우고 그 뜻을 새긴다. 즉 [마음 작용의 捨受가 그러하듯] 더불어 사는 삶의 연기을 해치지 않도록 행하는 것. 사수란, "죽음의 과정에서도 우리한테 식이 있고 촉,작의,수,상,사가 다 같이 흘러간다. 이와 같은 다섯가지 심리활동은 항상 사수, 즉 싫고 좋은 쪽으로 작용하지 않는 것이다. 함께 어루어진 생명활동을 어떻게 하면 잘할수 있느냐하는 쪽으로만 작용하는 마음작용이기 때문에 이 사수하고 하는 것은 우리가 말하는 탐심이나 진심이나 선이나 악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함께 이뤄내는 생..
想은 意가 만들고 상은 識에 의해 변한다. 상은 그자체로 앎의 흐름이므로 앎을 앎으로만 삼으면 괴로움이 없지만 이 앎을 후찰라에 부재로 인색해 상을 지으면 탐심과 진심이 동반한다. 즉 부재에 대한 집착을 일으켜 현재를 보지못하게 된다. 따라서 오온, 색수상행식의 순환에서 상이 식에 의해 변하게 될때, 상과 식 사이에 있는 행을 닦아 상이 있는 그대로의 상으로서의 앎이되도록 수행한다. 수행은 탐심과 진심이 동반하지 않도록 상 그대로의 상을 앎의 흐름으로 주시하는 것이다. 상을 짓는 것을 거부할 필요는 없다. 그 상을 고집하여 탐진심을 일으키는 것이 주목할 문제일 뿐이다. 예컨데 좋은 사람을 떠나보낸다고할 때 좋은 이라는 상이 잘못된 게 아니며 그자체가 있는 그대로의 앎이다. 다만 이 상을 다음 찰라에 부재..
"식이라고 하는 것은 이 미묘한 차이를 인식함과 동시에 인식된 차이가 그 자체로 남겨져서 뒤 앎을 지배하면 그 순간 바로 앞찰라에 청정한 의미로 알았던 것이 바로 뒤찰라에 妄識이 되버린다. 똑같은 인식활동이 그 자체로 청정한 식에 활동이 되고 그 자체로 망식이 된다. 식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 삶을 연기적 관계로써 한 생명을 원활하게 나타난 언어도 되고 동시에 다음 찰라를 지배하는 언어체계로 남겨질 때는 우리에게 妄想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식속에 망상이 남겨져 있다고 해서 삶 자체로써 이야기하고 그것을 종자라고 이야기한다. 우리에게 잘못되어져 있는 상태가 남겨져 있는 것을 특히 종자라고 한다. 인연처에서 식이 자기모습을 나타내면 여력을 남기지 않는다. 알긴 알되 현재를 철저히 앎과 동시에..
"보고,듣고,맛보는 것이 밖에 있는 것을 보고 듣고 맛보는 것이 아니고 밖에 있는 것을 그렇다고 결정된 어떤 인식으로 보고 있다. 그러면 밖이라고 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냐, 존재한다. 헌데 우리가 보고있는 이 상이라고 하는 것으로 밖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밖이라고 하는 것은 인연처에서 온갖 것이 개체이면서 동시에 한생명이고, 나도 한 개체이면서 동시에 한 생명이 온생명에 관계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생명이게 하는 그런 관계를 구성하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우리가 상을 지우는 순간 그것은 나와 더불어 함께 생명을 공유하는 생명을 만들어가는 인연으로서 자리잡지 않는다. 그와 같이 보는 상은 식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요. 함께 생명을 공유하는 것은 식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식에는 두가지 뜻이 있다...
"이 相이라는 것이 무엇이 있다고 본다고 하면, 識에 의해서 변해졌다라고 말할 수가 없게 되는데, 이 상이라고 하는 것이 철저히 과거에 인식된 결과가 마치 잠재되어 있는 것처럼 힘을 갖고 있다가 현재가 돼서 나타났기 때문에 우리가 뭘 보고 듣는다고 하는 것은 마음 밖에 있는 뭘 보고 듣는 것이 아니고 자기 마음이 모양을 내서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스스로 보고있다. 그래서 일체 모든 대상들은 다 과거에 집접된 인상들이 현재로 자기변화를 하면서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보고 있는 것이다. 붉은 색을 볼때는 붉은 마음을 보고 있고, 푸른색을 볼때는 푸른 마음을 보고 있다. 저 사람이 기분나쁜 소리를 할때는 저 소리가 기분나쁜게 아니고 저 소리는 기분나쁘다라고 정해진 자기..
앎이 생겨 앎을 성취하는데, 성취가 자취를 남겨 상이 만들어지고 상에 대한 탐심과 진심이 동반한다. 상이 만들어지는 것은 원래 좋은 것인데, 좋은 것이 탐심과 진심과 결합하여 상이 실체로 자리잡아 삶을 지배하면 나쁜 것이 된다. 즉 허상을 쫒는 삶을 살게된다. 그러므로 상이 만들어지더라도 그것이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실체가 아닌 허상을 탐하고 성내는 것은 마땅치가 않다. 어리석다. 이 어리석음이 괴로움을 만들고 있고 괴로움은 다시 이런 전도몽상의 사실관계를 알리려하고 있다. 해서 이와 같은 과정을 바로 알아 탐진심이 일어나도 끄달리지 말고 관계속에서 처해진 상황에 따라, 인연에 따라 이루면 탐진심을 내려놓은 바가 된다. 내 경험으로 보기에 탐진심을 내려놓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참는 것인데, 이는..
탁발수행은, 배고픔이 일어나면 음식에 대한 상이 있어 탐심과 진심을 동반한다. 좋아하는 것은 많이 먹으려하고 싫어하는 것은 먹지 않으려하고 배고픔이 채워지지 않으면 성내게 되는 맘이 동반한다. 탁발수행은 이런 탐심과 진심에 머물르지 않고 배고픔을 해소하기 위해 걸식 수행을 한다. 차제걸식은 좋아하는 것을 탐하는 것과 채우지 못해 성냄을 사전에 차단한다. 우리도 일상에서, 걸식은 아니더라고 같은 마음으로 수행을 해볼 수 있을 것같다. 먹고싶은데 못먹는 괴로움 먹기싫은데 먹어야하는 괴로움 싫어하는 음식이라 먹지않아 배고픔을 채우지 못해 생기는 괴로움 사소해 보일 수도 있으나 탐심과 진심에 이끌려 식생활을 하다보면 삶을 크게 훼손시킬 뿐아니라, 생활 전반의 걸친 탐진치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법성게에선..
"즉 배고픔이라고 하는 것은 어제 말한데로 여러가지 있겠지만 우리의 몸속에 들어있는 당이 얼마만큼 부족하는 가가 허기로 나오는 거죠. 배고픔이 있는게 아니라 당부족인데, 그 당부족이라고 말하는 것은 몸전체하고 상대해서 말한다. 사건은 배고픔이라고 하는 하나의 사건이지만 그 한 사건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 몸 전체와 상응했는데 배고프면 우리가 뭘 끌어오느냐 뭘 먹어야 되죠. 이 상태에서는 배고픈 상태가 단순히 배고픈 상태로 있는게 아니고 허기진 상태로 있는게 아니고 '밖에서 에너지를 충전하십시오'라고 하는 말을 같이 하는 것이다. 먹는다고 하는 것은 우리 몸 전체가 배고픔이라고 하는 사건을 만들어 내는데 그 사건 속에는 그러므로 몸 밖에서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하라는 신호다. 온 전체가 이 사건을 만들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