푀르크젠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가요? 마뚜라나 내가 그 상황을 어떻게 체험했는지를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의식을 잃는 과정을 관찰할 준비가 되자 나는 내 몸에서 모든 느낌을 잃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몸이 없었지만 살아 있으며, 거룩한 푸른 우주에서 - 온 방을 조용하고 고요하게 떠도는 가녀린 연기처럼 - 점차 사라져 간다는 의식은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나는 그 장업한 푸름 속으로 풀어지는 것 같았고, 녹는 것 같았으며, 모든 것과 함께 있는 하나가 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런 뒤 갑자기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머리가 아팠으며 메스꺼웠습니다.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고, 의식이 돌아왔습니다. '이 굉장한 체험이 의미하는 건 뭘까?'라고 자문해 보았습니다. '신을 본 것이었을까?' 신비한 체험이었을까?..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어떠한 체계에서 일어나는 것은 필연적으로 그것의 구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외부의 영향력들에 의해 구체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110) 보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이것은 어떤 분자체계에 충격을 가하는 외적 작용체가 일정한 효과들을 유발하지만 그것들을 결정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외부로부터의 어떠한 충격도 단지 어떤 구조적인 동학을 유발할 뿐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결과들을 체계 자체의 구조에 의해 특정지어지고 결정됩니다.(112) 감정이 일어나는 것은 나의 신체이다. 화가 난 나의 신체는 외부작용체를 원인으로, 예컨데 타인의 말이나 행동으로 인해 화가 난 것이 아니다. 타인은 유발할 수 있을 뿐이다. 비유하자면 부탁할 수 있을 뿐이다. 나의 신체..
분별심 내려놓기의 실천적 사유 1. 차이의 긍정 2. 반증가능성
니체가 주창한 '힘에의 의지'에서, 힘은 능동적인 힘과 반동적인 힘이 있다. 따라서 어떤 힘(능동적이든 반동적이든 상관없다)이 가해질때 우리는 능동적인 힘으로 반응하든지 반동적인 힘으로 반응할 것이다. 이때 능동적인 힘으로 반응하는 나의 의지는 긍정일 수 밖에 없다. 가해진 어떤 힘을 긍정해야만 능동적으로 반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반동적인 힘으로 반응하는 나의 의지는 부정일 수 밖에 없다. 그 힘을 부정해야만 반발적(반동적)으로 반응하기 때문이다. 반발적으로 반응하는 의지는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분별심이다. 분별심은 부정을 내포한다. 분별심은 자기가 옳다는 마음에 사로잡힘이다. 이는 "밖에 있는 것, 다른 것, 자기 자신이 아닌 것"을 부정하는 마음이다. 니체는 이를 '노예 도덕'이라 꼬집는다. ..
제4부 인간의 예속 또는 감정의 힘에 대하여에서 발췌 정리 43. 쾌감은 과도할 수가 있으며 악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고통은 쾌감이나 기쁨이 악인 한에 있어서 선일 수 있다. 증명: 쾌감은 기쁨이며, 이 기쁨은, 신체에 관한 한, 신체의 한 부분 혹은 몇몇 부분이 나머지 부분보다 더 많이 자극받아 변화되는 데에 있다(제3부 정리 11의 주석에 있는 정의 참조). 그러한 감정의 힘은 신체의 나머지의 작용을 능가하며 (정리 6에 의해), 신체에 끈질기게 달라붙어서 신체가 매우 많은 다른 방식으로 자극받아 변화될 수 없도록 방해할 정도로 매우 클 수가 있다. 따라서 (정의 38에 의해) 쾌감은 악일 수가 있다. 이와 반대로, 슬픔의 일종인 고통은 그 자체로만 보면 선일 수가 없다(정리 41에 의해). 그러나 ..
절대긍정=존중=인정과 이해=분별심 내려놓기=如如=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