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정신의 본성 및 기원에 대하여'의 마지막 부분 인용. 마지막으로 이 이론의 인식으로부터 어떠한 실제적인 이점들이 생기는지 밝히는 것이 남아 있다. 그것을 우리는 다음의 사항들에서 쉽게 알 수 있다. 1. 이 이론은, 우리가 신의 명령에 의해서만 행동하며, 신의 본성을 나누어 갖는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행동이 보다 더 완전하고 우리가 신을 보다 많이 인식함에 따라서 더욱더 그러하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그러므로 이 이론은, 우리의 마음을 완전히 평정하게 해줄뿐만 아니라, 우리의 최고의 행복 또는 지복이 어디에 있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즉, 우리의 최고의 행복 또는 지복은 신에 대한 인식에만 있으며, 이 인식에 의해서 우리는 사랑과 도외심이 권고하는 것들만을 행하도록 인도된다. 이것으로부터 ..
나는 자유란, 나에게 좋은 것은 하고싶은 대로 하는 것이고, 나에게 나쁜 것은 하고싶어도 하지 않는 것이고 나에게 좋은 것은 하기싫어도 하는 것이고, 나에게 나쁜 것은 하기싫은대로 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러할 때 나는 하고싶다와 하기싫다에 매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고싶다고 반드시 해야하는 것도 아니고 하기싫다고 무조건 하지않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하고싶다와 하기싫다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이런 자유는 하고 싶은데 하지 못하는 괴로움이나 하기싫은데 해야하는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나는 이것을 삶과 동행하는 자유라고 부르는데, 나는 실로 이렇게 살고 싶다. 다음으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이에 대해선 스피노자의 를 탐구할 필요가 있다. 삶과 동행하는 자유가..
1. 모든 것은 변한다. 모든 것은 공(空)하다. 모든 것은 인연이다. 모든 것은 이 세가지를 모두 만족한다. 2. [모든 것에 속하는] 인간은 변한다. [모든 것에 속하는] 인간은 공하다. [모든 것에 속하는] 인간은 인연이다. 인간의 죽음 역시 이 세가지를[변한다, 공하다, 인연이다] 모두 만족한다. 주석: 나는 공하다와 완전하다는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죽음이 공하다는 것은 완전하다는 것이다. 즉 죽음 또한 완전한 것이며 이런 인연에서 저런 인연으로 변함이다. 3. [인간의] 욕망은 변한다. [인간의] 욕망은 공하다. [인간의] 욕망은 인연이다. [인간의] 욕망은 이 세가지를 모두 만족한다. 주석: 욕망은 이 세가지를 모두 만족하면서 동시에 세가지를 생산하는 힘이다. 욕망은 생산이며, 리듬이며..
버릴 것은 욕심이지 욕망이 아닙니다. 욕망의 성취를 욕심으로 행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해롭게 하죠. 문제는 욕심이에요. 욕심이 앞서면 과정을 무시하고 결과만을 쫒고 욕심으로 인해 결과를 돈으로 사는 유혹에 쉽게 넘어가고 결국 돈으로 인해 사용하지 않는 근육처럼 무능력해지고 욕망을 돈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노예가 됩니다. 욕심을 버리고 욕망을 인정하면서 욕망의 과정을 수행하고 그 과정을 긍정하는 태도. 산에 오를때의 과정처럼 힘들고 애타지만 근육이 단련되고 자존감을 높이는 경험을 겪지않으면 욕망의 성취는 가짜에요. 욕망은 한순간에 사고팔 수 있는 대상이 아닌대도 자본은 이를 상품화하죠. 가짜를 만들어 유통시킵니다. 유통시키는 사람은 쉽게 돈을 벌 욕심이고 사는 사람은 과정없이 얻을 욕심에 사로잡혀 돈을 지..
『욕망해도 괜찮아』에서 소개하는 "왼쪽도 돌려대라"고한 예수의 가르침을 발췌 인용. 예수의 가르침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도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쪽 빰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는 말씀일 겁니다. 실천하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한때는 교과서에도 실렸을 만큼 대표적인 성서 구절이지요. 그런데 세계적인 신학자 월터 잉크는 그의 책 『예수와 비푝력 저항』에서 여기 나오는 오른편, 왼편 빰의 순서에 주목합니다. 먼저 얻어맞은 뺨은 왼편이 아니라 오른편 뺨입니다. 누군가 나의 오른편 뺨을 칠 때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왼편 손바닥이겠지요. 하지만 예수시대의 유대사회에서는 공적인 상황에서 왼손의 사용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상대방의 뺨을 때릴 때도 왼손은 쓸 수가 없었습니다. 마주본 상태..
스피노자는 에서 실재성과 완전성은 동일한 것이라고 정의한다. 세상의 모든 것, 곧 실재하는 것은 그 자체로 완전한 것이라는 뜻이며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일체가 모두 공하다는 일체개공과 회통하는 말이다. 공하다는 것은 그자체로 완전한 것이어서 그 자체에 좋고 나쁨이 있지 않으며 그자체로 완전하여, 그것은 그것일 뿐이다. 따라서 여기에 따로 지혜는 없으며 또한 얻을 것도 없다.(無智 亦無得) 다만 있는 그대로 보면 그뿐이다. 이를 반야심경에선 조견(照見)이라 했다. 있는 그대로를 '환히 비춰본다'는 말이다. 스피노자는 의 '1장 신에 대하여: 부록'에서 "사물의 본성을 이해하지 않고 단지 사물을 표상만 하는 사람들은, 사물에 관하여 아무것도 긍정하지 않고 표상력을 지성으로 여기기 때문에, 사물 및 자신들의 ..
이성의 기능은 바로 조견照見이구나. 나에게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직시할 수 있는 능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