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성공을 거둘 때 당신에게는 어느 것이 더 의미가 있습니까? 그림에서의 우연을 두고 당신이 사용했던 표현, 즉 '신이 당신 편이라는 느낌'인가요? 아니면 그 성공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호화로운 생활의 이점입니까? 성공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풍요로운 생활을 원합니까? 나는 '풍요로운 누추함' 속에서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언제나 호화로운 곳에서의 생활을 혐오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원할 때에는 호화로운 곳에 가서 화려한 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를 들어 좋은 호텔에서 머무는 것은 어떤 점이 좋습니까? 나는 안락함을 좋아합니다. 서비스를 쉽게 제공받을 수 있는 점도 좋아합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전혀 그런 방식의 삶을 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곳..
세상은 그냥 있는 그대로이다. 커다란 긍정에 몸을 맡기다. 날마다 좋은 날.
"헛되이 애를 써서 한쪽에 치우친 편견을 내세우면서 실은 모두가 하나임을 알지 못한다. 그것을 조삼(朝三)이라 한다. 조삼이란 무엇인가? 원숭이를 부리는 사람이 원숭이에게 상수리를 나누어 주면서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다."했더니 원숭이들이 모두 화를 냈다. 그래서 "그럼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다."하니까 원숭이들이 모두 좋아했다. 명칭(표현)도 내용(실질)도 변함이 없는데 기쁨과 노여움이 일게 되었다. 역시 자연 그대로의 커다란 긍정(肯定)에 몸을 맡기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은 시비를 조화시키고, 자연의 균형(天均)에서 쉰다. 이러한 것을 양행(兩行)이라고 한다." 재물론
1. 그것은 우상숭배의 문제이며 어떤 가르침 혹은 특정 인물에게 스스로를 종속시킴으로써 자신의 책임을 벗어버리려는 시도입니다. 그런 것은 우리가 지금 얘기하고 있는 낙담 혹은 실망의 끝이자 자신의 길을 의식하는 노력의 끝입니다. 물론 우상이나 지도자 혹은 위대한 사상에 매달리는 게 훨씬 편하겠지요. 더 이상 머리를 쓸 필요도 없고 자신을 세상에 완전히 내 맞길 수도 있으니까요. 저의 가르침은, 이 말을 덧붙이고 싶은데, 우리는 어떤 가르침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역설적이지만 매우 역동적인 역설입니다. 언젠가 어떤 강연에서 저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신사숙녀 여러분, 제가 지금부터 여러분에게 얘기하게 될 것중에 어느 하나도 믿지 마십시오!" 모두들 웃고는 저를 믿지 않아야 한..
니체는, 자기 자신이 체험했기 때문에 한 철학자의 생애를 신비롭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철학자는 금욕적인 덕목들-겸손, 검소, 순수-을 독점하여, 그것들을 아주 특별하고 새로운, 실제로는 거의 금욕적이지 않은 목적들에 사용한다. 철학자는 그것들을 자신의 독특함의 표현으로 삼는다. 철학자에게서 그것들은 도덕적 목적들도, 또 다른 삶을 위한 종교적 수단들도 아니며, 오히려 철학 그 자체의 이다. 철학자에게는 또 다른 삶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들뢰즈, 스피노자의 철학 10) 겸손. "그것은 결코 제 자신의 인성이 아닙니다." 검소. "소유,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순수. "춤추기가 춤추기의 목적" 진실에서부터 손수건까지, 그 무엇도 소유할 수 없다. 사유재산이란 도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