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보기에 존재하는 것이지 체계 그 자체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나는 없고, 또 없는 것도 없습니다. 나는 분명 없는 것도 아니고 따로 있는 것도 아닙니다. 있다/없다의 흔들리는 줄 위에서 나를 떠나지 않으면서 나를 떠나야 흔들리지 않습니다. 어떻게요? 환상처럼 봅니다. 가령, "어떤 사람의 진정한 지혜는 영속적인 자기 고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찰의 역량에, (특정한 상황들을 정확하게 지각해내는 것을 방해하는) 이러저러한 신념들을 기꺼이 버릴 수 있는 자발성에 있다는 것이 내 견해입니다. 현명한 사람은 늘 자기 자신을 관찰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물에 집착하지도 않습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해야만 하는가를 지시하고 있는 궁극적 진리에 인도되고 있다는 ..
1. 다른 누군가가 내 안에서 보는 것 - 그것은 결코 내 자신이 아닙니다. 그것은 결코 내 자신의 인성이 아닙니다. (있음에서 함으로 314) 2. 비범한 사람들요? 아시다시피 많은 사람이 내가 위대한 화가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난 내가 위대한 화가인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난 단지 내 본능적 욕망으로 그릴 뿐입니다. 내 뇌 안에 있는 이미지들을 정확하게 재창조하려고 노력할 뿐이지요. (인간의 피냄새가 내 눈을 떠나지 않는다. 45) 3. 물론 제가 어떤 특정한 인식이론의 대변자라고 주장하는 몇몇 사람들이 있으니까 당신의 말이 옳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맞지 않습니다. 저는 어떤 인식이론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다만 놀랄 뿐이고 이 세계로부터 매료당할 뿐이고 이 세계를 이해하려 할 뿐입니다. ..
2. 말해지는 모든 것은 인지하는 기계를 거쳐 지나갑니다. 그러면 그 기계는 입에서 나오는 소음 혹은 종이 위에 있는 긁적임을 가지고 세계를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듣고 보고 읽는 다른 사람은 다시 자신을 위해서 자신의 방식으로 그러한 세계를 산출해 내고요. 누가 과연 진리를 소유하고 있을까요? 사랑하는 신이 이 물음을 결정해 줄 메시지를 하늘에 적어줄까요? 실제 어땠는지 누가 압니까? 아무도 모른다고 말하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진지한 뉴욕타임즈는 끔찍한 연예지인 와는 다른 소식들을 인쇄한다는 겁니다. 이게 다입니다. 우리는 다만 (일어난 일에 대한 ) 그림들만을 갖고 있고, 그 그림들을 우리는 다른 그림들과 비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어떤 보도를 그리고 어떤 사진을 믿고 싶어 하는지를 결정할 수..
1. 이 세상에는 저절로 일어나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신의 뜻도 아니고, 전생의 죄 때문도 아니고, 우연히 일어난 일도 아니에요. 단지 내가 그 원인을 모를 뿐입니다. (법륜스님, 인생 4) 2. 당신은 진실을 확실하게 규정해보라고 제 등을 떠밀며 요구합니다. 저는 그저 약간의 직관이 있다는 게 놀랍기만 해요. 저는 모른다고 말할 수밖에 없어요. 모른다고 말할 때, 저는 사유의 위대한 승리를 선언하는 셈입니다. 저는 모릅니다. 그래서 좀 더 나은 사유로, 좀 더 본질적인 사유로 생각해요. 왜냐하면 혹시 안다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인 제 기준으로 아는 것이니까요. 저는 도, 미, 솔, 레... 모든 음들을 알고, 16분 음표도 알지요. 뭐든지 다 분석할 수 있어요. 그러나 슈베르트의 ..
모든 선택에는 공덕천과 흑암천이 함께 다닌다. 공덕천 그대로가 흑암천이 되고 또 흑암천 그대로가 공덕천이 된다. 아름다운 미모에 취해 공덕천을 선택하면, 보기 싫은 흑암천도 따라온다. 또 어쩔 수 없이 인연 따라 흑암천을 선택하면 몰랐던 공덕천이 따라온다. 멀리서 보면 공덕천이, 가까이에서 보면 흑암천인데 그 이름이 공덕천과 흑암천일 뿐. 공덕천과 흑암천이 둘이 아니다. 부자가 선택하든 가난한 사람의 선택이든, 선택에는 공덕천과 흑암천이 공존한다. (부자는 공덕천만 선택하고, 가난한 사람은 흑암천만 선택할 순 없는 법.) 이 둘을 음악의 메이져 코드와 마이너 코드처럼 조화롭게 배치해 아름다운 노래로 만든다면 어느 인생이 멋지지 않겠는가! 이제 우리는 어떤 선택이든 상관없다. T. 똑같은 사람인데, 공덕천..
고와 락은 함께 다닌다. 음악의 나란한 조처럼 고 안에 락이 있고 락 안에 고가 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고가 락이라는 것, 락이 고라는 것이다. 지금 크기의 고는 동일한 크기의 락이였고, 지금 크기의 락은 앞으로 동일한 크기의 고이다. 해서 작은 완전성에서 큰 완성으로 이행, 큰 완전성에서 작은 완전성으로의 이행이 있을 뿐. 고도 없고 락도 없다. 내가 보기에 고이고, 내가 보기에 락이다. 환상처럼 보는 사람들은 고락의 윤회를 떠나지 않으면서 고락의 윤회를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