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뚜라나 대체로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재능은 있으나 상상력이 부족하다고, 도무지 창의성이 없다고 말합니다. 내가 인지라는 주제는 피하고 단지 내 실험들을 계속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랬다면 이미 노벨상을 받았을 거라고 말입니다. 나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내가 의학부를 그만두어야 한다는 뜻인가요?" 대답은 그렇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내 작업이 분명하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언짢았지만, 어느 날 한 친구가 내가 꼭 이해받아야 하는지, 도대체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받을 필요가 있는지 물었습니다. 정말 그가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왜 이해받아야 하는 거지?'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작업을 진지하게 수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이 나는 어떠한 논쟁도 피하지 않았고 내 견..
마뚜라나 의심할 바 없이 나의 어머니가 나의 정신적이고 지적인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어머니는 내가 세계에 대한 나 자신의 이해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가르쳤고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를 갖도록 가르쳤습니다. 어느 날 내가 형과 놀고 있을 때 어머니가 우리를 부른 적이 있었습니다(그 때 나는 11살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말씀하셨죠. "애들아! 어느 것도 그 자체로 좋거나 나쁜 것은 없단다. 어떤 행동은 적합할 수도 있고 부적합할 수도 있고, 옳거나 틀릴 수도 있단다. 그래서 어느 쪽을 정하느냐는 너희들의 책임이란다." 그리고는 덧붙여 말씀하셨지요. "좋아, 이제 다시 나가 놀으렴." 포르크젠 이 일화가 선생님에게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마뚜라나 만일 어떤 행위가 그 자체로 좋거나 나쁜 것으로 ..
불교의 가르침처럼 모든 것이, 모든 행위가 마음이 짓는 바라고 하면 마음은 언어로 표현될 수 밖에 없으며 이 마음이, 또는 이 언어가 출현하는 상황은 마뚜라나가 말하는 '행위의 조정의 조정'이 발생할 때이다. 가령 제자가 스승에게 '불법이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때 이는 바로 언어가 출현하는, 질문자의 '행위의 조정의 조정'을 유발할 질문을 제자가 던지는 것이고 이는 언어를 통해, 그러니까 언어가 아니면 발생할 수 없는 '조정의 조정' 과정인 것이다. 이때 스승은 언어가 출현하고, 마음이 짓기 시작하는 이 단계에서 무의미한 대답을 통해 '조정의 조정'의 과정을 되돌려 공의 이치를 깨우치는 안내자 역활을 한다. 불법이 무엇인지는 실로 그 대답이 어떻든지 언어의 출현과 그 이전을 깨닫는데 있다. 마뚜라나 ..
1.올바른 경청을 위해서 어느 정도로는 하나의 체계에 자신들을 통합시켜야 합니다.(무편각적 마주침) 2.하지만 그와 동시에 일어나고 있는 일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는 위치를 점하기 위해, 그리고 성찰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만 합니다.(직각적 마주침) 예를 들어 어떤 어머니가 자신의 딸의 끔찍한 행위에 대해 나에게 불평하고, 그 때 내가 그 소녀에게 그녀의 행위가 정말로 너무 끔찍하다고 말해주고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녀에게 너무 끔찍하다고 말해주고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녀에게 묻는다면, 나는 그 체계 안에 에워싸인, 그래서 그 체계를 그 상태 그대로 유지해 주는 상호작용들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 체계를 긍정하지 않고 체계의 구..
푀르크젠 선생님이 요법학계에 대해 정식화할 핵심 요구는 다음과 같은 것이 되겠군요. '다른 사람들을 통제하고 결정한다는 생각을 버려라. 그러나 당신이 무엇을 하건 간에 그것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선언하라.' 마뚜라나 바로 그겁니다. 자기들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할지를 결정할 수 없다고 깨닫게 된 사람들은, 자기들의 행위들이 갖는 성질이 그들의 지혜의 범위에 달려 있다는 것 역시 깨닫게 됩니다. 치료사들의 지혜란, 편견 없이 경청할 수 있는, 그리고 '개방성과 무간섭'의 태도를 보여줄 수 있는 그들의 능력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는 게 나의 주장입니다. 따라서 관계 속에서 자기를 표현하고자 하는 모든 것은 편견과 개인적 편애에 의해, 그리고 속임수 기술들이나 통제 욕망들에 의해 왜곡되지 않고, 그것이 ..
푀르크젠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가요? 마뚜라나 내가 그 상황을 어떻게 체험했는지를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의식을 잃는 과정을 관찰할 준비가 되자 나는 내 몸에서 모든 느낌을 잃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몸이 없었지만 살아 있으며, 거룩한 푸른 우주에서 - 온 방을 조용하고 고요하게 떠도는 가녀린 연기처럼 - 점차 사라져 간다는 의식은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나는 그 장업한 푸름 속으로 풀어지는 것 같았고, 녹는 것 같았으며, 모든 것과 함께 있는 하나가 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런 뒤 갑자기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머리가 아팠으며 메스꺼웠습니다.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고, 의식이 돌아왔습니다. '이 굉장한 체험이 의미하는 건 뭘까?'라고 자문해 보았습니다. '신을 본 것이었을까?' 신비한 체험이었을까?..
마뚜라나 그렇다면 무엇이 대안일 수 있을까요? 자유의 황홀한 이점들을 사람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그들을 감옥에 가두고 사슬에 묶어야만 할까요? 폭력을 거부하라고 우리가 사람들을 강제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접근법은 결코 효과가 없을 것입니다. 내 견해는 이렇습니다. 소위 윤리적 법률과 규범들조차도 성찰의 가능성을 파괴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개인적으로 책임 있는 행동의 토대들을 제거하고 복종을 요구합니다. 더 면밀히 살펴보면 그것들은 폭정을 위한 또 하나의 표현에 불과합니다. 당신은 어떤 세계관이나 삶의 방식이 선택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습니다. 당신은 그들의 믿음과 행위들에 내재해 있는 결과들을 그들에게 제시해 줄 수 있지만, 그것은 그들에게 무엇을 하도록 강제하거나, 사..
마뚜라나의 대담집의 제목은 이다. '있음에서 함으로'는 그말 자체로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 있음은 주체와 대상이 있음이다. 분리다. 함은 주체와 대상이 하나다. 이어진다. 달리 표현하면 '있음에서 함으로'는 '둘에서 하나로'인 것이다. 마뚜라나의 통찰을 토대로 말하자면 우리는 함의 세계에 살고 있다. 함이 없으면 세계도 없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하지않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살아있다는 것이 바로 함이다. 우리는 함의 세계를 살고 있으면서, 있음의 세계에 있다고 상상한다. 이 역시 전도몽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