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은 또한, 인간들이 - 자율적이지만 자유롭지는 않은 - '구조적으로 결정된' 체계들이라고 주장하는 군요. 이렇게 힘 있는 용어는 결정론의 특징을 강조하면서, 선생님은 어떻게 여전히 의미심장한 방식으로 책임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건가요? 나의 테제는 '스스로를 자유롭다고 인식하는 사람들만이 자신의 행동들에 대해 책임을 주장할 수 있다.' 바로 그렇습니다. 생명체계들은 아무런 의도도 목적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책임 있는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단지 존재의 흐름 속에서 살아갑니다. 오직 인간들만이 언어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관계들의 영역 속에서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인간들은 어떤 행위를 책임 있는 것으로 서술할 수 있습니다. 언어를 통해 우리는 다른 살아 있는 존재들에게 우리의 행위가..
나는 가능한 존재방식의 문제 및 외부 실재의 영향력 정도의 문제와 철학자로서가 아니라 과학자로서 씨름했다는 것을 주장하고 싶습니다. 철학 이론들은 우리가 선험적으로 타당하다고 간주하는 어떤 설명적인 원리들을 유지하고자 할 때 나타납니다. 원리들의 유지와 그것들의 정합성에 대한 관심은 '체험될 수 있는 것'을 경시하는 것을 정당화합니다. 그와 반대로 과학 이론은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것'과 관련된 정합성들을 유지하고자 할 때 나타납니다. 따라서 과학자는 원리를 무시하고, 그것들을 해체하며, 과학 이론을 설계합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했던 것입니다. 나는 체험 내의 정합성들에서 시작했습니다. 나는 비둘기들의 색채 지각을 연구했습니다. 다시 말해 생명체계들의 작동들을 연구했습니다. 그리고 내 연구의 목적을..
그는 도롱뇽이 외부 세계의 벌레를 자신의 혀로 겨눈다는 가정에서 출발했습니다. 그의 물음은, 그레고리 베이트슨이 말했던 바처럼, 하나의 인식론 전체, 특수한 세계관을 함축합니다. 외부의 객체가 그 모양과 위치에 대한 정보의 형태로 도롱뇽의 두뇌 속에서 처리된다는 점이 은연중 당연한 것으로 가정됩니다. 그 결과로 도롱뇽은 실수를 저지릅니다. 도롱뇽은 외부로부터 다가오는 정보를 올바르게 처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 실험을 전혀 다른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훨씬 의미 있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주장할 것입니다. 노롱뇽은 (혀를 움직이고 내뻗는 것으로 이어지는) 자기의 신경체계의 활동들을 망막의 일정 부분의 활동들과 서로 연관시킵니다. 만일 벌레의 영상이 비치면 도롱뇽은 자기의 혀를 내뻗습..
개념적 분류의 요점은 이것이겠군요. 선생님은 실제로 어떤 형태의 더불어 살기를 사회체계라고 부르는 겁니까? 이 용어는 보통 인간관계들로 이루어진 구조들의 전체 집합을 가리키기 위한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됩니다. 만일 당신이 일정한 종류의 행위를 비사회적이라고 특징짓는 것을 주의 깊게 들어보면, 그것이 타자에 대한 존중의 결여를 둘러싸고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낼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존중없이 행동할 때, 예컨대 그들이 이웃의 소유지에 있는 정원 담장을 가로질러 무심코 쓰레기를 버릴 때, 우리는 그들의 비사회적인 행위에 대해 불평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경우에 보통 듣게 되는 불평들은 언제나 하나의 감정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개념적 특정화를 가지고 나는 무엇이 사회적인 것인지에 대한 규정을 내릴 의향이..
선생님은 개인과 사회 사이에 모순이 있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개인에 대해 이야기하고 개인성[개별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보통 개인이 자율적이고, 단자이며, 외적 인상들로는 파악하기 어렵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그와 반대로, 사회의 형성적 힘을 전면에 내세우는 사람들은 대개 개인의 투과성을 주장합니다. 즉 개인들이 그들이 속한 집단의 눈을 통해 그리고 그들의 역사의 배경에 의지해서 세계를 관찰한다고 가정하는 것이지요. 내 견해는 그와 다릅니다. 나는 개인과 사회 사이에 어떠한 모순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사회는 근본적인 감정을 기초로 해서 더불어 살아가는 개인들의 집합입니다. 사회 공동체의 구성원은 어쩔 수 없이 한 사람의 개인이며 또 그렇게 남아 있습니다. 개인들이 서로에게 이야기하고, 약속을 ..
이러한 사유의 결과물들은 무엇일까요? 그것들은 오래된 히피의 슬로건 - '사랑을 하라, 전쟁말고/' - 으로 수렴될까요? 아닙니다. 우리 인간들은 상이한 감정들이 상이한 가치들을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따금 이러한 감정들의 실현을 억압합니다. 모든 종류의 명령들은 언제나 우리가 선전자들과 폭군들의 역할들에 운명적으로 다가가도록 부추깁니다. 그것들은 차별화에 알맞은 수단입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해서 다음과 같이 거만한 분위기로 선언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사랑을 강력히 지지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전쟁을 사용한다!" 그래서 나는 사랑을 설교하지 않고, 어떠한 계율도 정식화하지 않으며, 사실상 어떤 것도 추천하지 않습니다. 사랑도 무관심도, 우정도 증오도 말입니다. 하지만 나는 만일 ..
선생님은 사랑에 기초한 '더불어 살기' 형태가 독재보다 더 안정적이라고 이야기하는 건가요? 우리는 압제적인 지배자들이 끔찍한 파멸을 야기할 수 있을 뿐이며 지배를 영구히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충분히 자주 체험했습니다. 아돌프 히틀러의 기획된 천 년 ' 제국'은 액 12영 동안만 지속되었을 뿐입니다. 하나의 체계는 그것을 구성하는 조건들이 유지되는 한 존재할 것이기 때문에 항상 그와 같이 작동할 필요는 없습니다. 완전한 독재는 반대자들을 체계적으로 제거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붕괴를 막습니다. 하지만 만일 사람들이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사랑을 발견한다면, 그들은 끊임없는 억압에 맞서, 그리고 개인으로서 계속적으로 부정당하는 것에 맞서 반항할 것입니다. 천 년 동안 기획된 독재는 궁극적으로 전 세계를 그 자신..
이것은 또한 다음을 함축합니다. '윤리적 참여는 우리 자신의 사회적 귀속 영역을 넘어 확장되지 않는다.' 이 표제기사에 비추어 본다면, 타자는 더 이상, 우리와 공통적인 것을 아무것도 갖지 않은 인간으로 보이겠군요. 그렇습니다. 전쟁에 연루된 당사자들에 있어서 윤리적 자극들을 파괴하는 한 가지 가능성은 상대방[적}을 인간들의 형상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적은 인간성을 박탈당하고, "하류인간"이자 "극단론자", "공산주의자"나 "나치"로 강등됩니다. 전쟁에 참여한 군인들에게 제시되는 지침들에는 '먼저 죽이고 나중에 생각하라'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타자를 정당화하는 영역, 즉 사랑의 영역을 모든 인간들을 보호하기 위한 방식으로 기꺼이 확대하려는 사람들만이, 차별적 명명법들에 휘둘리기를 거부하는 사람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