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적 정체성을 가르치고 강요하는 동일성의 사유는 이 모든 차이가 최소화되고 사라지도록 억누르고 억압한다. 반면 무상과 차이를 본다면 '남성'이란 동일성 안에 수많은 차이가 숨어 있음을 보고, 그것들에 따라 동일한 것이 달라질 수 있음을 보는 것이다. 차이의 철학은 그런 차이화에 대해 억지로 막지 않고 열어둘 것을 요구한다. 그런 차이화에 의해 발생하는 다양성을 긍정하는 것이고, 동일성에 가두려는 권력에 대항하고, 차이를 긍정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는 동일성이 피할 수 없는 것이기에, 무상한 차이가 부지중에 지워지고 잊히기에 더욱더 챙기고 유심히 새겨두어야 한다. 필연적 무지에 의해 구성되는 피할 수 없는 허구의 세계, 업종자와 명언종자에 의해 구성되는 이 동일성의 세계에 대해 그것이 꿈과 같은 환..
1. 무지가 실상을 보지 못하는 것이라면, 이는 근본적으로 동일성 때문에 무상의 실상을 볼 수 없는 이런 조건에서 기인한다. 근본적 층위에서 발생하는 이 무지란, 새끼줄을 뱀으로 오인하는 것뿐만 아니라, 뱀을 뱀이라고 보는 데 포함된 오인이다. 눈앞의 대상이 전에 본 뱀과 '동일한' 대상이라고 보는 데서 오는 오인이다. 따라서 그것은 눈을 가려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눈을 사용하기에 보이지 않는 것이고, 귀가 막혀 들리지 않느 것이 아니라 귀로 분별하기에 들리지 않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단지 '빛이 없어서' 무상의 실상이 가려지는 것이 아니라, 눈이 필요로 하는 빛에 의해 무상의 실상이 가려지는 것이다. 이런 무지를 '근본적 무지'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는 세상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는 게 아니..
1. 업이라고 불리는 언행은 이처럼 다시 몸, 입, 의지로 되먹임feedback되어, 이전에 했던 것을 좀 더 쉽게 하도록 만들고, 그 결과 하던 일을 계속 반복하는 '상향'을 만들어낸다. 좋아하는 것을 좀 더 반복하게 하고 싫어하는 것을 피하려는 성향을 만들어낸다. 이것도 자업자득이고 자작자수다. 업이란 말에는 하던 것을 계속하게 하는 성향이, 그런 관성적인 잠재력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업의 힘은 각자의 삶을 어떤 영역 안에 머물게 하고, 어떤 궤도를 돌며 비슷한 방식으로 반복하게 만든다. '정체성'이라고도 번역되는 '동일성identitiy'은 이런 업의 힘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와 달리 자신에게 되먹임되는 과정[불수자성]을 그때마다 만나는 조건의 차이를 집어넣는다면[수연성], 그 조건의 차이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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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에게 계속 반복되는 유일한 문제는 항상 똑같은 변하지 않는 주제를 매번 새로운 표현형식을 찾아서 표현하는 일입니다.
어떤 선택을 하든 언제나 인생은 공평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선택하면 좋아하니까 내가 행복하죠. 이런 경우 내가 좀 숙이고 살아야 해요. 나를 더 좋아하는 사람과 살면 사는 것은 좀 편한데 내 마음에 만족감이 떨어져요. 항상 부족함이 남아 있어요. 그러니까 어느 것이 더 좋다고 말할 수 없어요. 선택은 문제가 안 됩니다. 어떤 선택을 해도 좋은데 여러분이 선택을 망설이는 이유는 선택의 결과에 대해 책임지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선택에는 선악도, 옳고 그름도, 잘하고 잘못함도 없습니다. 그저 선택에 따른 결과를 예측하고 그것을 감내하면 어떤 선택을 해도 좋은 것입니다.
긍정적으로 보는 눈이 이루어져서 다른 사람도, 회사도 긍정적으로 보게 되면 이제 나 자신의 문제보다 조직이나 사회의 불합리한 문제들로 관심이 옮아갈 겁니다. '저런 것을 좀 고치면 힘들어하는 동료들이 더 편안하게 지낼 텐데.'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면 이제 이것은 세상을 바꾸는 운동으로 변합니다. 내가 불편해서 하는 것은 불평불만에 그치기 쉽죠. 하지만 나는 괜찮지만 저런 문제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힘들어하니까 좀 고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은 변화를 일으키는 운동의 시작입니다.
이제 두 번째 문재를 생각해봅시다. 북한의 어린아이들이 굶어 죽는데도 나는 몰랐다고 가정해보죠. 모르면 나한테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그렇다고 굶어 죽는 아이들이 죽지 않습니까? 내가 몰라도 굶어 죽는 건 죽어요. 그 문제는 내가 눈감는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 문제는 내가 스스로 눈을 뜨면 해결되지만 세상에서 굶어죽고 고통받는 중생을 해결하려면 내가 눈을 뜬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눈감고 안 본다고 문제가 사라지거나 해결되지 않습니다. 내 괴로움은 남과 논의해서 해결되는 게 아니라 내가 깨쳐야 해결이 되고, 고통받는 이웃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내가 피한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에요. 내가 피하면 내 속에서 없어진 것이지,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어요. 외면한다고 해결되지 않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