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라는 말에서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는 어떤 '인격'을 떠올리는 것에 대해선 이렇게 말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부처란, 연기법의 작용을 통찰하여 그에 응하되 내부화된 성향에 머물지 않고 그때마다 적절한 대응의 양상을 찾아내는 능력에 부여된 이름이다. [불수자성 수연성] 어떤 결정성도 갖지 않기에 어떤 연기적 조건에도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는 그런 능력 자체에, 능산적인 능력으로서의 마음이라고 했던 그런 능력에 붙인 이름이 부처다. 애초에 모든 마음이 그렇기에, 비록 내부화되어 안정적이지만 동시에 관성적인 마음의 작용을 넘어서, 관성적인 힘에서 벗어나 이탈의 선을 그리는 능력이 바로 부처다. [응무소주이생기심 ]
3. 분별을 떠난 분별은 각각의 것들이 가진 미덕이나 가치를 보는 것이다. 모든 것이 좋다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의 거대한 존재론적 평등성 속에서 보는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모든 게 다 똑같이 좋다고 함을 뜻하는 건 아니다. 배를 띄우려는 사람에겐 깊은 물이 더 좋고, 물을 건너려는 사람에겐 얕은 물이 더 좋은 법이다. 그렇기에 분별을 떠난 사람 또한 어떤 조건에서는 어떤 것이 '더 낫다'고 말할 수 있다. 아니, 분별을 떠났을 때 비로서 어떤 조건에서 어떤 게 더 나은지 정확하게 '분별'할 수 있다. 이 또한 분별을 넘어선 분별이다. 분별심을 넘어선 지혜로운 분별이다.
1. 호오와 미추를 분별하는 예술이란 관념과 척도를 깨버리자, 모든 것이 예술이 될 수 있게 된 것이다. 분별의 척도가 사라지자, 어던 것도 예술작품이 될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동물이나 인간을 기준으로 하는 분별의 척도가 사라지면, 식물은 움직이지 않아도 살 수 있으니 좋고, 동물은 움직일 수 있어서 좋음을 비로소 알게 된다. 2. 고인 물은 고여 있어서, 흐르는 물은 흐르고 있어서 좋다고 함은 특정한 하나의 척도로 분별하는 게 아니라 각자가 갖는 미덕을 그 각자의 기준으로 '분별'하는 것이니, 이미 분별을 떠난 분별이다. 이렇게 분별하면 모든 것이 아름답고 모든 것이 좋은 게 된다.
중요한 건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만났을 때 그것을 거부하고 밀쳐내는 게 아니라 그것ㅇ르 이해하려고 귀 기울이고 마음을 여는 것이다. 흔히 '정의'란 올바른 분별의 기준이라 생각하고, 정의로운 판단이란 올바른 판단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이미 확립된 기준에 입각한 정의란, 양식이나 상식처럼 많은 사람이 공유하고 있는 분별의 척도를 뜻할 뿐이다.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정의를 이와 아주 다른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공동의 기준을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잘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타자성의 영역에 마음을 열고 최대한 이해하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타자성을 통해 지금, '정의'라고 믿고 있는 것을 수정하고 바꾸는 것이 정의라고 한다. 이 역시 분별을 넘어선 곳에서..
1. 요컨대 분별이란 호오와 애증의 선판단이 함께 작동하는 판단이고, 그렇기에 호오와 애증의 감정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인식이다. 그래서 승찬 스님은 앞서 인용한 의 문장 바로 다음에 이렇게 썼던 것이다. "오직 애증을 떠난다면 사태의 실상이 통연명백하다. 2. 분별이란 바로 이런 탐심과 진심의 작용이라는 것 또한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3. 따라서 팔정도의 첫 번째에 나오는 '정견'이란, 옳은 견해를 세우는 게 아니라, 내가 옳다고 믿는 견해를 내려놓는 것이다. '정사유'또한 '옳은' 것을 사유하는 게 아니라 그런 생각하기를 멈추는 것이다. 호오미추의 척도를 내려놓고 애증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저 사람이 하는 얘기가 들리고 그가 왜 저런 생각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애증을 떠나면 ..
1. 인연으로 다가오는 것을 오는 대로 긍정하고 그것과 기쁘게 공생하는 법을 아는 것을 '지혜'라 하고, 그런 지혜를 가진 이를 '부처'라 한다면 공동체로서의 중생은 모두 부처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126) 2. 나 잘못 먹으면 몸을 상하고, 잘못 마시면 죽기도 한다. 내가 먹고 마시는 것들에 포함도니 미생물들로 인해 병들기도 한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공동체의 경계를 뚜렷하게 하고, 드나드는 것을 관리하는 면역계가 만들어진다. 면역반응의 요체는 내 몸 안에 있는 것과 바깥에 속하는 것을 구별하는 것이고, 나의 생존을 위해 밖에서 들어온 것을 처분하는 것이다. '나'의 안팎을 구획하는 '자아'는 이런 이유로 만들어진다. (불교를 철학하다.p127) 3 ......'자아가 강하면 자기를 잡아먹는 것이다..
1. 그런데 동일화하려는 힘이 '진리'의 이름을 얻어 가르쳐지고 집단적으로 강요되는 지금 세계에서, 그 윤리학적 관심은 타인들, 아니 사람들을 겨냥하고 있는 동일성의 권력을 정지시키고 약화하려는 '정치학적' 관심을 뜻한다. 이를 '차이의 정치학'이라고 명명하자. 석가모니가 당시 적지 않은 반발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신분이나 성에 개의치 않고 모든 사람을 승려로 받아들였던 것을, 심지어 앙굴라말라창은 '악마적 범죄자'로 지탄받았던 이들마저 승려로 받아들였던 것을 나는 이런 의미로 이해한다. 굳이 불교라는 말에 큰 수레를 뜻하는 '대승'이란 말을 덧대었던 것은 불교의 가르침이, 윤리학이란 말이 빠지기 쉬운 '개인'이란 영역이 아니라 중생이라고 부르는 뭇 사람들, 집단적인 동일성의 권력으로 인해 고통받는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