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들이 늘상 게임만 하고 있어, 게임중독이라 이름 붙여 문제시 해왔는데, 아들이 게임을 하는 소리를 자주 듣다보니 게임 중독이 아니라 친구 중독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은 헤드셋을 끼고 학교 친구들과 [비록 따로따로 떨어져 있지만] 시끌버쩍 수다떨며 욕도 섞어가면서 재미나게 놀고 있구나.' 놀이가 즐겁지 않고선, 밥도 제때 먹지 않고 장시간 앉아있기란 불가능하다. [아들은 게임에서 레벨은 중간 정도 되는 것 같고. 선수가 될 생각은 조금도 없다] 우리 때에 비춰보면 당구에 미쳤다고나 할까, 당구장에 살다시피해도 당구 중독이라 이름 붙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때 그 당구에 미친 친구들은 지금 잘 살고 있다. 정말 있는 그대로 본다면 코로나 시대의 너무나도 자연스런 현상일 수도, 게임..
만일 내가 당신의 말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회화에서 혹은 다른 예술에서 중요한 일은 감정을 느끼는 것이다. 이런 뜻인가요? (잔인한 손 122) 인터뷰로 엮은 책의 질문자들은 늘 자기가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인한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말한 사람의 의미는 청자에게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심리 상담소에서 알게 된 이마고 대화법은 이런 점에서 매우 적절하다. 2. 자기들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할지를 결정할 수 없다고 깨닫게 된 사람들은, 자기들의 행위들이 갖는 성질이 그들의 지혜의 범위에 달려 있다는 것 역시 깨닫게 됩니다. 치료사들의 지혜란, 편견 없이 경청할 수 있는, 그리고 '개방성과 무간섭'의 태도를 보여줄 수 있는 그들의 능력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는 게 나의 주장입니다. 따라서 관계 속에서..
기독교는 과보를 무릅쓰고 사랑을 강조하고 불교는 깨달음이 중요하고, 어렵다. 1. 사랑은 어떤가?
나의 아들에 한에서 말하자면, 아들의 게임 중독, 부모의 눈치도 보지 않으면서 컴퓨터 앞을 밤낮 없이 지키는 모습을 보면서 그동안 아들에 대한 사랑이 부족하지 않았나하는 자각을 하게 되었다. 아빠인 나는 아들에게, 아들이 원한다면 언제든 컴퓨터를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줘야한다. 아들의 자율을 보장하고 아빠를 든든한 지원군으로 신뢰하도록 사랑을 주어야한다. 정말이지 아들에게는 '게임이 보약이다'라고 생각해야겠다. 게임 중독을, 아들이 아빠를 신뢰할 수 있는 관계 회복의 절호의 기회로 삼자. 얼마나 다행인가.
퇴계선생의 맏아들이 21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한창 젊은 나이의 맏며느리는 자식도 없는 과부가 되었다. 퇴계선생은 홀로된 며느리가 걱정이 였습니다. '남편도 자식도 없는 젊은 며느리가 어떻게 긴 세월을 홀로 보낼까?' 그리고 혹여 무슨 일이 생기면 자기집이나 사돈집 모두에게 누(累)가 될 것이기에, 한밤중이 되면 자다가도 일어나 집안을 순찰하곤 했습니다. 어느날 밤 집안을 둘러보던 퇴계선생은 며느리의 방으로부터 '소곤소곤' 이야기하는 소리가 새어나오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순간 퇴계선생은 얼어 붙는 것 같았습니다. 점잖은 선비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며느리의 방을 엿보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젊은 며느리가 술상을 차려 놓고 짚으로 만든 선비모양의 인형과 마주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내 보기에, 이중 보기의 관점은 두 가지로 정리해 본다. 첫번째는 정해진 것은 없다는 실체 없음의 관점이다. 무아로 요약되는 실체는 없는데 작용은 있는 이중 보기. 두번째는 마뚜라나가 제시한 바처럼 신경체계의 폐쇄성과 관찰자 시점의 이중보기[비행기 조종사의 예]. 또 신체 변용의 결과만을 받아들이는 의식이, 환상의 장소임을 논파하는 스피노자식 설명 방식도 두번째에 가깝다. 두 가지로 구분하지만 서로 다른 것은 아니다. 마뚜라나는 생물학자의 방식으로, 스피노자는 철학자의 방식으로, 부처는 수행자의 방식으로. 그 설명하는 손가락이 다르지 가르키는 달은 하나다.
보살님은 한국에 간 것도 아니고, 자식의 태도가 갑자기 바뀐 것도 아니지만 당신의 깨달음으로 자신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까지 변화시켰습니다. 이것이 바로 있는 그대로의 무주상보시의 공덕입니다. 가히 상상할 수 없는 공덕을 성취하신 이분의 손을 잡고 저는 기쁨의 눈물을 함께 흘릴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을 머무르는 법에는 어떠한 차별도 없습니다. 할머니든 젊은이든, 백인이든 흑인이든, 교회에서든 절에서든 이 법은 평등합니다. 가난하면 몸으로 봉사할 수 있어 좋고, 돈이 있으면 시주할 수 있어 좋은 것처럼 베풂에 있어서도 차별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불법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금강경 강의 92)
독재의 시절은 이제 분명히 사라졌습니다. 1989년 칠레에서는 자유선거가 다시 치러졌습니다. 이 나라는 이제 과거에 대한 정당한 평가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고 있습니다. 만일 (이제는 국제적으로 비난을 받는 늙은 남자이면서도 아직까지 많은 칠레인들에게 숭배를 받고 있는) 피노체트와 만날 수 있는 또 다른 기회가 생긴다면, 선생님은 그에게 뭐라 말하겠습니까? 칠레의 위대한 자유 투사인 베르나도 오히긴스처럼 행동하라고 조언해주고 싶습니다. 어느 날, 폭군으로 변했다고 공개적으로 비난받게 되었을 때 그는 격노한 대중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내가 무엇을 했건, 나는 그것이 우리나라에 이득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했습니다. 만일 내가 야기했을 수도 있는 고통과 괴로움이 내 피를 바쳐서 덜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