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어질고 현명한 왕이 있었다. 연일 국정에 몰두하던 왕이 모처럼 짬을 내 신화들과 함께 사냥을 떠났다. 아침 일찍 떠났다가 저녁에 환궁할 요량이었는데, 사냥에 심취한 나머지 미처 해가 기우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날이 너무 어두워 궁궐까지 갈 수가 없었다. 충직한 신하들은 얘가 탔다. 왕이 말했다. 저기, 저 민가에 하루 묵도록 하자. 신하들은 펄쩍 뛰며 두 팔을 내 저었다. 어떻게 전하께서 누추한 여염집에 들 수가 있겠느냐며, 밤길을 재촉해서라도 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때 왕이 말했다. "내가 저 집에 들어가면, 내가 백성이 되겠느냐 아니면 저 집이 궁궐이 되겠느냐."1 2. 신하들의 집착과 왕의 자유로움. 왕의 자유로움은 불수자성 수연성. 궁궐과 왕을 동일시하는 신하들의 집착. 집착을 끊..
세상 사람들은 모두 아름답게 보이는 것을 아름다운 것이라 여기고 있지만 그것은 추한 것일 수도 있다. 모두가 선하게 보이는 것을 선한 것이라 여기고 있지만 그것은 선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세상사람들은 좋은 과보로 보이는 것을 좋은 것이라 여기고 있지만 그것은 나쁜 과보일 수도 있다 모두가 나쁘게 보이는 것을 나쁜 것이라 여기고 있지만 그것은 나쁜 과보가 아닐 수 있다. 과보는 좋고 나쁨을 너머 다를 뿐. 내가 보기에 좋고 나쁨을 따질 뿐. 해서 어떤 과보든 좋은 과보가 된다면 어떤 선택이든 자유롭다. 불행해질 수가 없다.
책임을 미루면 과보가 따르고 책임을 다하면 부작용이 없다.
정의를 추구하는 것은 별로 달갑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늘 개념적 제약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제게 책상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책상은 다리가 네 개이고 평평한 덮개를 갖고 있고 아이들이 뛰어 오를 수 있는 것이라고 답할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책상과 조랑말과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설명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끝에 가서는 살아있는 존재와 살아있지 않은 것 간의 차이에 대해 말해야 할 겁니다. 결과는 이미 알려져 있습니다. 모든 정의라는 것은, 제가 볼 때, 배제하고 한계 짓는다는 근원적인 약점을 갖고 있습니다. (발명품 165) 2. 규정을 하려는 그러한 시도들 속에서 아주 멋진 무지개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고 먼저 저의 기쁨을 표현하고 싶습니다. 이것들은 접근방법의 다양성을 허용해주는 것..
가령 책임지는 태도는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