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장차 재목이 되기도 하고 재목이 되지 못하기도 하는 중간에 처신하겠다. 그러나 재목이 되고 재목이 되지 않는 것의 중간이란 것은 도와 비슷한 것 같으나 도가 아니다. 그러니 얽매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만약 도와 덕을 타고 유유히 떠다니는 자라면 그렇지 않다. 칭찬도 없고 비방도 없으며, 한번은 용이 되었다가 한번은 뱀이 되었다가 시간과 더불어 변화하면서 한 곳에 집착하지 않고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조화로움을 자신의 법도로 삼을 것이다. 만물의 근원에서 노닐면서 사물을 사물로서 부리되 외물에 의해 사물로서의 부림을 받지 않을 것이니 어찌 얽매임이 있겠느냐! 이것이 바로 신농과 황제의 법칙인 것이다. 그러나 만물의 정황이나 인간 세상의 습속은 그렇지 않다. 모이면 흩어지고, 이루면 무너지고,..
마뚜라나 바로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겪은 체험들의 유사성이 결코 구조적 결정론을 반박하지는 못합니다. 약을 먹는 것은 특유한 구조들을 갖는 분자들을 당신의 유기체 속으로 가져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들은 나중에 유기체의 일부가 되고 그것은 신경체계 구조를 변경시킵니다. 약을 먹는 것은 특유한 구조들을 갖는 분자들을 당신의 유기체 속으로 가져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들은 나중에 유기체의 일부가 되고 그것의 신경체계 구조를 변경시킵니다. 하지만 '일어나는 일'은 신경체계 자체의 구조에 의존할 것입니다. 당신이 집어삼키는 물질에 대응하는 유기체 내부의 수용체들이 없다면, 결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기억해 두어야할 것은 수용체가, 문제되고 있는 물질 - 예컨데 약-의 구조에 부합하는 특유한..
'나란 무엇인가?' 누구나 한번쯤 해 보았을 이 쉽지않은 철학적 물음에 가장 명쾌한 답을 주는 것은 불교다. 불교는 나는 오온이다.라고 한다. 오온이란 무엇인가? 「반야심경」에선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수행을 하실때 오온이 모두 공함을 비춰보시고 일체의 괴로움을 건넌다. 오온이 모두 공함을 깨달는게 불교의 핵심이다. 오온(五蘊)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쌓임(蘊)이다. 색은 몸이고 수상행식은 마음의 작용이다. 다시말해서 오온은 지금의[蘊] 몸과 마음이다. 즉 오온이 나라는 것은 나란, 몸과 마음의 작용들이 쌓여 이룬 것인데, 이 오온이 모두 공(空)하다는 것이 불교의 핵심사상이고 이는 무아(無我)란 말로 요약된다. 한가지 눈여겨 볼 특징은 불교가 마음의 종교라는 것이다. 몸을 가리키는 말은 색 하..
1.0 평상심(平常心)이란 몸과 마음이 합일된 상태다. 2.0 마음은 보여줄 수 없으며 몸은 말할 수 없다. 3.0 마음은 몸을 통해서만 표현된다. 그 역도 동일하게 성립한다. 즉 몸의 상태는 마음을 통해서 표현된다. 4.3 스피노자식으로 말하면 마음과 몸은 실체의 '양태들'이다.(실체는 자연이다.) 그런데 마음은 몸을 떠나 존재할 수 없고 몸도 마음을 벗어날 수 없다. 따로 존재할 수 없기에 마음은 몸으로 표현된다. 표현된다는 말은 존재한다는 뜻으로 마음은 몸으로 존재한다. 혹은 몸에 내재한다. 그 역도 동일하다. 몸은 마음으로 표현된다. 예컨데 동의보감에 따르면 꿈은 몸의 상태를 표현한다. 덧붙여 마음에서 일어나는 7정(喜/怒/憂/思/悲/恐/驚)은 몸의 상태의 표현이다. 마음을 표현하지 않는 몸은 더..
스피노자의 자연주의 철학은 실체와 양태로 요약된다. 자연이라는 실체는 [자연이라는] 양태로 표현된다. 다시말해서 자연은 실체이며 양태인데, 실체의 속성들이 양태로 표현된다. 또는 실체는 이 속성들을 통해서 표현된다. 양태란 자연의 속성들의 표현인데 음행오행으로 말하면 속성은 예컨데 목화토금수로 추상되는 성질이며 이는 대표적으로 나무, 불, 흙, 쇠, 물이란 양태로 표현된다. 스피노자가 본 자연이란 이런 양태들의 총합이다. 실체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개체들 하나하나 다는 실체[자연]의 변형된 모습이고 양태이다. 이는 화엄경에 나온다는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을 연상시킨다. 스피노자의 실체와 양태를 통해 생각해보는 것은, 속성과 양태를 설명하기위해 음양오행설과 화엄경 법계연기를 들어 이해하..
1. 핵심정리 이 책은 철학의 문제를 다루며, 이런 문제가 만들어지는 방식이 우리 언어의 논리에 대한 오해에 놓여 있음-내 생각으로는-을 보여준다. 그 전체 의미에 따라서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말해질 수 있는 것은 모두 명료하게 말해질 수 있으며,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것이다. 1. 의미 있는 언어의 최소 단위는 단어가 아니라 명제다.(『논고』4.001 참조) 2. 명제는 현실의 그림이다.(4.01 참조) 2.1 그림 그릴 수 없는 명제는 무의미하다. 2.11 말해질 수 있는 것은 모두 명료하게 그려질 수 있다. 2.12 말할 수 없는 것, 즉 그림 그릴 수 없는 것은 무의미하므로 침묵해야 한다. 3. 그림은 자기 자신의 회화적 형태를 말할 수 없다. 3.1 그것은 말해질..
어느 때 부처님은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서 뛰어난 비구 1250명과 함께 계셨다. 그 때 세존께서는 공양 시간이 되자 가사를 입으시고 직접 바리때를 드시고 사위성에 들어가 걸식하실 적에 그 성안에서 차례대로 걸식을 마쳤다. 다시 본래 머물던 곳으로 돌아와 공양을 하신 뒤 가사와 바리때를 제자리에 놓으시고 발을 씻은 다음 자리를 펴고 앉으셨다. 「1, 법회인유분」 『금강경』이 선사하는 가슴벅찬 감동은 말하는 것-이 역시 보석같은 감동이지만-보다 말하지 않는 것에 있다. 『금강경』의 등장인물 수보리가 부처님께 감복하는 이유도 말하지 않는 것에 의한 감동이었다. 어디 수보리 뿐일까! 『금강경』을 읽다보면 문득, 조금 뒤늦게, 수보리처럼 감복하는 순간이 온다. 내[이미 여러사람의] 경험에 의하면, 그것은 『금강경..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벗어난 삶, 또는 자유를 상상할 수 없다. 따라서 자유는 주어진 조건 속에서 가능한 선택들을 의미하는데 하지만 그 가능의 수들, 선택 가능한 여지가 곧 자유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삶, 또는 자유는 그 조건인 시간과 공간이 조화를 이루는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되야 한다. 만일 나의 자유가 시간과 공간의 불일치를 초래하는 행위를 선택하고, 거듭 주장한다면 그것은 분명 삶을 파멸로 몰고 갈 것이다. 때문에 자유가 삶과 동행하는 것이라면 진정한 자유는 시공간과의 조화만을 요구한다. 그외 가능의 수들, 즉 선택 가능한 잘못된 불일치들의 수는 삶에 역행하는 자유를 의미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말은 타당하다. 진정한 자유는 삶과 동행하는 자유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