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식을 저자들의 용어와 회통의 관점에서 풀어보자면, 의식意識의 다섯가지 작용인 업식業識, 전식轉識, 현식現識, 지식智識, 상속식相續識에서 업식이라는 코드가 전식의 '코드화'와 현식인 '재코드화'가 되어 지식의 분별을 이뤄 상속식을 이루는 '재영토화'의 과정을 거치는데 중요한 것은 이 작용이 순차적인 것이 아니라 한 모습이며 한 모습을 관점별로 풀어본 것이란 것과 탈코드화 탈영토화가 이뤄지는 때는 지식이 상속되지 않는 시점, 즉 기존의 가치, 코드가 상속되지 않도록 탈코드화하여 탈영토화하는데, 탈코드화와 탈영토화가 따로 있지 않고 코드화하는 것과 영토화하는 것이 동일하다는 것. 즉 주체도 없고 대상도 없고 다 마음의 장[심왕]에서 일어나는 마음작용[심소]이다. 탈코드화와 탈영토화는 항상 일어나는 것이다. ..
분별과 기억의 작용을 스스로 자각하지 못한 상태에서 아려야식에 담겨 있는 결정된 분별과 기억에 의해서 인연의 장이 일정한 색깔을 갖게 됩니다. 인연의 변화가 기억된 분별이 되고 결정된 인식 내용을 갖게 되면서[아려야식], 인연에 변화를 자각하지 못한 무명이 있게 되고, 무명에 의해서 마음작용 그 자체를 자각할 수 없어 마음이 연기의 각성으로 있는 줄 모르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무명에 앞서 아려야식이 무명의 원인으로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연의 각성을 자각하지 못한 상태이면서 동시에 인식 내용으로 남게 되는 분별을 만드는 것이 무명이며, 만들어진 분별을 저장하고 있는 것이 아려야식이기 때문입니다. 연기의 장을 자각하지 못하는 무명에 의해서 아려야식이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며, 인연에 의해서 분별된..
'물든 것 같다'고 하는 것은 청정한 알아차림은 물들 수 없기 때문이며, 번뇌를 발생시키는 분별과 기억조차 그대로 알아차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허상일지라고 허상 그대로를 알아차리며, 번뇌가 발생되고 나서 번뇌의 속성에 대해 살피고 반성을 하게 될 때도 그대로 알아차립니다. 그렇기에 알아차리는 본성을 깨달은 마음이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청정과 청정하지 않는 상태에 대한 지각이 있고 나서야 깨달은 마음이 됩니다. 깨닫고 나면 알아차림이 총체적으로 개달음이 되어 알아차리는 본각本覺과 깨달은 마음인 시각始覺이 하나가 되고, 깨닫지 못할 때는 깨닫지 못한 상태의 '물들지 않는 알아차림'과 '분별'과 '기억'이 함께하면서 총체적으로 깨닫지 못한 마음이 됩니다. T1000.0 :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허상일지라도..
우리네 일상은 사건, 사물들을 분별하여 알아차리고 기억하며, 다음 상황에 대해서 예측하면서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일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면서 할 수도 있고 습관적으로 하기도 하겠지요. 습관적으로 하는 것은 알아차릴 필요 없이 이미 알고 있는 대로 하는 것이라 현재의 일이 과거와 같고, 미래 또한 상속되는 과거이겠지요. 현재를 살면서 현재를 놓치는 것입니다. 현재를 분명하게 알아차린다는 것은 한 생각에 담겨 있는 삼세를 보는 것이며, 삼세를 만들지 않는 분명한 판단으로 삼세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알아차림이 없는 현재는 현재일 수 없습니다. 습관적인 마음에는 '분명하게 분별하고 새로운 기억을 만들면서 삼세를 창조하는 지성智性의 작용'이 살아 있지 않기 때문이며, 분별된 것과 기억된 ..
비유하면 목화금수는 흙그릇의 모양이고 토는 흙이다. 목화금수가 봄여름가을겨울로 그릇 모양을 표현하므로 각각이 다르지만 다 흙이라는 바탕에서는 같다. 모든 그릇의 모양과 흙이 하나이며 동시에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본모습이다. 어느 것이 어느 것보다 더 뛰어난 게 아니다. 봄이 여름보다 뛰어나지 않으며 가을이 겨울보다 모자란 것이 아니다. 하나하나가, 실재하는 모습 자체가 완전한 것이며 따라서 완전한 것에서 완전한 것으로의 이행이 있을 뿐이다. 봄여를가을겨울 어떤 것도 무엇이 있어 봄여름가을겨울로 변하는 것이 아니고 그 모습하나하나 자체가 변하는 본모습이다. 우주의 모든 존재는 이와 같이 인연 조건에 따라 오행을 나투고 있다. 하나하나 생명이 오행을 표현하고 있고 다시 하나하나 생명은 뭇 생명 전체로 어울린..
無常은 常見과 斷見 사이의 치우치지 않는 中道인데 상견[생]이 아니면서 단견[멸]도 아니고 상견[생]이 아닌 것도 아니면서 단견[멸]도 아닌 것도 아닌 묘한, 말로 포착할 수 없는 흐름의 양상이다. 음양을 추상할때 -- ― 으로 표현하는데 음의 표현은 단견을, 양의 표현은 상견을 추상한다고 볼 수 있다. 음양은 氣의 흐름으로 표출되는데 기를 이야기할때 생하고 멸한다고 하지 않고 모이고 흩어진다고 한다. 이는 기가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불생불멸임을 표현한다. 음양은 실체가 없으며 현상으로만 존재하며 그 자체가 활동이다. 항상 활동하고 있으며 이 활동은 음과 양에 머물지 않는 중도로 모습을 드러낸다. [생명활동이 곧 중도이다] 언어를 빌어 음과 양이 음으로만 양으로만 표현될때가 있더라도 음으로만 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