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다가 그 초막에 당도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머리를 산발하고 풀옷을 걸친 사람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묻습니다. "스님께서 이 산에 들어와 사신 지 몇 해나 되었습니까?" 법상스님이 답합니다. "둘레의 산 빛이 푸르렀다가 누레지는 것을 보았을 뿐이네." 수행자는 과거와 미래에 살지 않고, 오로지 현재를 최대한으로 살고자 하기에 지나간 세월에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러자 젊은 스님은 나갈 길을 묻습니다. "산을 내려가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흐름을 따라가라." 법상 스님의 대답입니다. 시냇물을 따라가면 마침내는 사람이 사는 마을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깊은 산중에서 조난을 당했을 때,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면 능선을 올라가서 능선 길을 찾는 방법이 있고, 능선 길이 너무 높으면..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는 연기법이다. 연기법을 깨닫는다는 것은 그로인해 연기법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해서 깨닫는다고 해서 이유 없이 부자가 되거나 권력을 쥐거나 우월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깨달음을 통해, 또 수행을 통해 달라지는 것은 자유로와진다는 것이다. 마음에 걸림이 없고 두려움이 사라진다.[心無罫碍 無罫碍故 無有恐怖] 즉,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한다. 비록 그 육신은 가둘 수 있으나 그 정신[마음]은 어디에도 가둘 수 없는 자유. 평안. 행복...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처럼. (십자가는 상징적으로 과거에는 천한 신분이 될수도 있고 각자의 원치않는 운명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어떤 것이든 자유로울 수 있으매 고귀하다.)
자기 만족이란, 인[원인]연[조건]과[결과]보[보상]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반면 욕심은 인연과보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욕심은 만족하지 못하고 괴로움을 자초한다. 욕심은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는 법칙을 벗어나 요행을 바라는 터무니 없는 마음이기에 이뤄질 수 없고 이뤄질 수 없으니 괴롭다. 욕심을 버려야할 이유다. 인연과보에 만족하는 자기만족은 잃을 것도 없고 따로 얻을 것도 없기에 작은 만족에서 큰 만족으로 나아가든 큰 만족에서 작은 만족으로 나아가든 늘 만족한다. 인연과보를 받아들이는 삶이란 늘 만족하는 삶이고 불행해질 수 없는 삶이고, 날마다 좋은 날이다. [그런데 삶은 본래 인연과보를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즉 이미 완전한데 단지 모를 뿐이다.]
내 생각에 유클리드 기하학과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관계는 이렇다. 둘의 구분을 대략 말하면 전자에선 평행하는 두 직선은 서로 만나지 않으나 후자에선 평행하는 직선이 무한이 뻗다보면 만난다. 이는 지구의 평행하는 경도가 북극과 남극에서 하나로 만나는 것을 보면 이해가 쉽다. 이를테면 유클리드 기하학은 매끄러운 공간을,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홈패인 공간과 대비되는데, 창공의 비행기는 매끄러운 공간을 날고 있지만 그 비행기의 그림자는 홈패인 공간인 땅에 드리워져 있어 그 모양이 울퉁불퉁하다. 전자와 후자는 따로 떨어져 있지 않고 서로 공존한다. 이러한 관계는 여기저기서 찾아볼 수 있다. 먼저 몸과 마음도 평행하는 두 직선처럼 떨어져 있으나 서로가 하나임을 알아야한다. 유클리드 기하학과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공존처럼..
집안 일을 도와주는 남편과 집안 일을 도와주지 않는 남편은 의 '조삼모사/조사모삼' 우화처럼 본래 차이가 없다. 집안 일을 도와주지 않는 남편은 집안 일이 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집안 일을 "도와주는" 남편 역시 집안 일이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후자는 도와주는 것으로 인해 자상한 남편/아빠/사람이라는 좋은 평판을 듣고 싶은, 바라는 마음이 있기에 생각되로 되지 않으면 시비에 휩싸이고, 되려 마음 고생을 하게 된다. 그런데 집안 일이 내 일이라는 마음을 내는 남편은 내 일이므로 달리 보상 받을 게 없고 시비할 게 없으며 나를 이롭게 할 뿐이다. 이로서 자리이타自利利他, 자기를 이롭게 하는 일이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는 일이 된다. 그리고 자리이타는 마음의 시비를 내 일이라는 한마음으로 조..
헛되이 애를 써서 한쪽에 치우친 편견을 내세우면서 실은 모두가 하나임을 알지 못한다. 그것을 조삼(朝三)이라 한다. 조삼이란 무엇인가? 원숭이를 부리는 사람이 원숭이에게 상수리를 나누어 주면서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다."했더니 원숭이들이 모두 화를 냈다. 그래서 "그럼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다."하니까 원숭이들이 모두 좋아했다. 명칭(표현)도 내용(실질)도 변함이 없는데 기쁨과 노여움이 일게 되었다. [그것은 시비에 구애되어 있기 때문이다.] 역시 자연 그대로의 커다란 긍정(肯定)에 몸을 맡기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은 시비를 조화시키고, 자연의 균형(天均)[즉 만물제동(萬物齊同)의 도리]에서 쉰다. 이러한 것을 양행(兩行;대립된 두 쪽이 다 순조롭게 뻗어 나가는 입장)이라고..
道行之而成, 物謂之而然 - 제물론 "도는 행해짐으로써 이루어지고 사물은 그렇게 일컬어지기에 그렇게 된다." 장자는 도가 활동임[道行之而成]을 말하고 있다. 회통의 관점에서 이와 관련해 비트겐슈타인의 글귀가 떠오르는데,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해야 한다." 즉 비트겐슈타인식으로 말하면 도를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고[道可道 非常道] 오직 도는 행해짐, 활동으로서 이루어짐을 다시한번 새긴다. 하지만 이것만으론 충분하지 않는데, 비트겐슈타인의 마지막 명제들을 보면 6.54 나의 명제들은 다음과 같은 점에 의해서 하나의 주해 작업이다. 즉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만일 그가 나의 명제들을 통해-나의 명제들을 딛고서-나의 명제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인식한다. (그는 말하자면 사다리를 딛고 올라간 후에는 그 사다리..
살다보면 자신의 생각과 다른 생각들과 부딪치게 된다. 남들이 뭐라하든 나의 길을 꾸준히 가면되고 나또한 남의 인생에 간섭할 필요가 없다. 나의 생각이 맞더라도 그것은 나의 인생, 나의 인연 속에서 맞는 것이지 내 방식이 맞더라도 그의 인생, 그의 인연속에서는 맞지 않을 수 있으므로 간섭하지 않는 것이다.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생각에 대해 무관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생각이 다름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하고 다른 생각의 입장에서 이해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다름을 이해함으로써 이제 다른 생각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부할 수 있다. 거부하는 온당한 이유는 이해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게 간섭하지 않는 이유이다.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은 집착에도 무관심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中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