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좋았던 기억이 슬픔을 만들고 나빴던 기억이 기쁨을 만든다. 좋았던 기억에 메여있으면 새로 닥친 현재에 깨어있지 못하고 현재를 슬픔으로 인식한다. 또한 기쁨에 들떠있다면 나빴던 기억에 매여있는 것으로 새로운 현재에 깨어있지 못한다. 둘다 과거가 현재를 지배하는 상황으로 현재를 살지 못하고 있다. 2. 욕구나 욕망 역시 좋았던 기억을 상속해 현재를 결여의 상태로 만든다. 그러나 결여의 상태로 다가오는 현재란 없으며 얻을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는 텅빈충만의 상태로 펼쳐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욕망을 좋았던 기억에 매여 작동하는 현상으로 알아차리면 욕망하는대로 따라가지 않고 지금의 상태, 즉 기억이 상속되는 상태를 알아차려 알아차림으로써 욕망에 예속되지 않을 수 있다. 욕망에 예속되지 않는 것은 금욕과는..
반야의 지혜를 터득한 사람에게는 괴로운 생사도 없고 즐거운 열반도 없습니다. 오직 고요하고 평화로운 가운데 바란 일이 모두 이루어진 것처럼 삽니다. 바라는 의지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분명하게 의지가 작용하고 있으나, 의지하는 내용에서 보면 어느것도 잡지 않으므로, 잡으려는 것도 없고 버리려는 것도 없습니다. 일어나면 일어나는 것이 의지가 되고 열반이 되며, 사라지면 사라지는 것이 의지가 되고 열반이 되니, 바람 없다는 데서 보면 아무런 바람이 없지만 이루어진 데서 보면 모든 바람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람 없는 의지가 바람이 됐으므로 바람이 있으나, 바람 없는 내용에서 보면 바람이 없으니, 바람 없는 의지야말로 모든 것을 이루는 의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정화스님, p120 T100..
법法이라는 개념은 언어 표상에 맞는 동일한 보편성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어느 것(法)을 지칭하고 있는데, 무상 속에서 다름을 분별하여 기억하는 마음의 상속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다른 모습들(一切法)이 그 모습 그대로 인정될 수 있는 근거가 있다는 뜻이면서도 그 모습들이 마음의 나타남이라는 데서는 어느 것도 제 특성만을 고집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전 찰나의 법을 허물면서 후찰나의 법이 되기에 기억과 동시에 기억을 떠나 법이 되어 법 스스로 법이라는 개념을 부정하면서 법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형상(相)으로 드러난 마음이지만 그 형상의 보편성(相)이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형상을 부정할 수밖에 없어 '모양 없음(無相)'이라고 하지만, 모양 없음이라는 보편상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모양 없음도 부..
번뇌와 깨달음이 하나의 작용 속에 함께 있는 것과 같아 깨달음이 일어나면 번뇌가 없어지는 것과 같고 번뇌가 작용하면 깨달음이 없는 것과 같으나, 마음 작용 하나하나는 그 자체로 삶과 앎의 인연을 전체로 드러내고 있으므로, 번뇌일 때는 번뇌만 있고 깨달을 때는 깨달음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앎의 속성을 바로 보고 이해한다면 번뇌가 곧 깨달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번뇌를 불러일으키는 마음작용이 일어나는 순간에도 온전히 깨어 있게 되면 번뇌를 아는 것이 아니라, 자각된 깨달음만 있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마음 하나 살펴 일어나고 사라지는 무상과 무상이 앎이 되는 인연을 온전히 자각한다면, 한없는 번뇌 또한 깨달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 정화스님 T1000.0 : 은 마음이야말로 '소의경전'이라고 한다. 마음..
혜능 스님의 게송이 나타내고 있는 뜻을 신수 스님은 알 수 없었다고 단경에서는 이야기하고 있지만, 신수 스님께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수행자가 인연의 각성을 자각하지 못한다고 하면 '청정'이라든가 '한 물건이 없다'라든가 하는 것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곧 인연의 각성을 자각하지 못하는 한, 밝은 거울 같은 마음이 먼지에 덮여 있는 것과 같으니, 부지런히 수행하여 번뇌를 만드는 마음씀을 털어내고 청정한 마음과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면 모든 것이 연기의 공성에서 청정하지 않는 것이 없으나, 수행자가 이것을 체험하지 못했다면 청정성을 보지 못하게 하는 분별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강조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한 물건도 없다'는 뜻을 바르게 알지 못하면 허무에 빠지거..
의 32번째 대목을 보면 금강반야바라밀을 수행하는 수행자는 "인연 따라 만들어진 모든 것들을 마치 꿈,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갯불과 같다고 보아야 한다."라고 공성空性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는 것이 인연 따라 잠시도 머묾 없이 변하는 모든 것의 실상인 공성을 보는 것이며, 공성을 온전히 보고 이해하면 반야의 지혜가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반야부 경전 전편을 관통하고 있는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알아차려야 하는 까닭은 어느 것 하나 두 찰나를 연속하여 동일한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고 변하므로 '있다(有)'라고도 할 수 없지만, 찰나마다 다른 모습으로 앎이 상속되니 '없다(無)'라고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앎이 상속되는 것에서 보면 항상 있는 것 같고, 찰나의 다름이 앎이..
따라서 마음을 그쳐(止) 흐름을 본다(觀)는 것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앎이 대상들을 그저(止) 보면서(觀) 앎에 깨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수행자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러다 보면 변화가 앎이 되고, 앎이 변화로 자신을 드러내는 현재를 보게 되는 것이지요.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리는 마음이 인연의 변화 밖에서 인연을 살펴 아는 것이 아니라, 알아차리는 마음 그 자체가 인연의 본질인 줄 분명하게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청정한 몸과 마음이 따로 있고 그 위에 번뇌라는 먼지가 묻어 있는 것처럼 몸과 마음을 이해한다면, 몸과 마음과 청정한 앎의 모습을 제대로 본 것이 아닙니다. - 정화스님, p30 T1000.0 : 알아차리는 수행을 할때 마음을 관찰하는 입장이 되기때문에, 관찰하는 마음과 관찰 대..
차별 없는 인연 자체의 변화에서 온갖 차별이 나오므로 차별된 낱낱은 인연 전체의 무게를 담고 있는 차별이 되고, 인연을 모두 담고 있는 차별이기에 인연의 각성에서 보면 차별된 그 모습 그대로가 차별을 떠난 실상이 됩니다. 차별 없는 자리에서 온갖 차별이 나오고, 차별이 그 모습 그대로 차별 없는 불성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 정화스님, p21 T1000.0 : "차별 없는 인연 자체의 변화에서 온갖 차별이 나오므로" 스피노자의 에선 기쁨의 감정을 작은 완전성에서 큰 완전성으로 이행으로, 슬픔을 큰 완전성에서 작은 완전성으로의 이행으로 정의하는데, 기쁨과 슬픔의 차별은 차별 없는 인연 자체의 변화에서 나오기 때문에 큰 완전성과 작은 완전성의 차별로 나온다. 스피노자의 용어을 쓰자면 "양태"란 차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