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공부하는 사람은 오고 가는 대상에 자신의 욕망과 이미지를 결부시켜 파악하는 분별을 내려놓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러면 분별된 이미지가 알아차리는 마음에 비친다고 할지라도 그 이미지의 흐름을 잡지 않기 때문에, 곧 자신의 욕망 등을 투사하여 보려는 속성을 내려놓았기 때문에, 이미지를 갖되(相) 이미지 스스로가 이미지를 해체시켜 무상하게 변해가는 모습(無相)을 보고 이해할 수 있으며(正見), 욕계의 욕망 등을 좇지 않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正思惟). 이렇게 형성된 바른 이해와 생각을 생각생각으로 이어가면 욕망을 충족시키던 대상을 통해 얻게 되는 기쁨과는 다른 수승한 기쁨이 일어납니다. 그리하여 밖을 좇던 마음이 안으로 마음 집중을 통해 성취된 수승한 기쁜을 향유하다가, 수승한 기쁨조차 쉰 고요한..
1. 결국 중요한 것은 사막이 매끄러운 공간인가, 도시가 홈 패인 공간인가가 아닙니다. 매끄러운 공간은 홈이 패이게 마련이고, 반대로 홈 패인 공간 또한 매끄러운 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매끄러운 공간에선 매끄러운 공간에 적합한 삶과 실천을 창안해야 하며, 홈 패인 공간에선 홈 패인 공간에서 다시 매끄러운 공간을 만들어 살아가는 삶과 실천을 창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동일한 공간을 흘러가는 상이한 두 가지 여행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종류의 여행을 구별해주는 것은 "측정 가능한 혹은 척도적인 운동량이나, 단지 마음속에 있을 법한 어떤 것이 아니라 공간화의 양식, 공간에서의, 공간에 대한 존재방식"(MP, 602;II,272)입니다. 유목민은 움직임에 의해 ..
물론 몸은 영원한 것이 아니며, 여러 가지 물질적인 것이 화합되어 이루어진 한때의 유기체이지만, 몸을 단지 그렇게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몸이 하나의 법당일 수도 있습니다. 마음이 곧 부처라면 이 몸은 부처가 거처하는 법당일 수 있습니다. 법당이라고 생각하십시오. 그렇게하면 이 몸을 함부로 다루지 않게 될 것입니다. 저마다 자기 부처가 있기 때문에, 자기 몸이 부처를 안고 있는 법당이기 때문에, 그 법당을 늘 청정하게 지키고 가꾸어야 합니다. 결코 소홀이 해서는 안됩니다. (p71) '깨달은 사람이 더 닦을 것이 무엇인가?'하겠지만, 바로 알았기 때문에 참으로 닦을 수가 있는 것이비낟.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깨닫기 전에 닦는 것은 진실한 것이 아닙니다. 수행, 닦는 행위는 일시적인 일이 아닙니다. 지속적..
어제, 의견이 충돌하여 마음에 동요가 생겼다. 화가 일어나는 마음의 동요를 알아차리고 알아차린 상태로 화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려봤다. 허나 아주 수동적이고 화가 지나가기까지 시간이 꽤 길다. 해서 생각한 방법이 몸을 움직이는 것이다. 몸을 움직여 기분을 바꾸는 방법을 생각했으나 화가 가시지 않는한 몸을 움직이는 것도 내키지 않아 쓸모가 없다. [이와 같이 기다리거나 몸을 움직이는 방법은 화를 알아차리기는 했으나 화를 참는 것이란 결론이다.] 관찰을 통해 화가 일어난 마음의 동요를 재빨리 평안하게 하는 방법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것이다. 나와 의견이 충돌한 사람의 입장에서 그가 말한 의견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이해하는 노력. 나의 의견도 옳고 그의 의견도 옳을 수 있다. 다 사람마다 겪는 인연..
세상 사람들은 모두 아름답게 보이는 것을 아름다운 것이라 여기고 있지만 그것은 추한 것일 수도 있다. 모두가 선하게 보이는 것을 선한 것이라 여기고 있지만 그것은 선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본시 유(有)와 무(無)는 상대적인 뜻에서 생겨났고, 어려운 것과 쉬운 것도 상대적인 입장에서 이루어지며, 긴 것과 짧은 것도 상대적으로 비교하는 데서 있게 되고, 높은 것과 낮은 것도 상대적인 관념에서 있게 되며, 음악과 소리도 상대적이 소리의 조화의 구별이며, 앞과 뒤도 상대적인 개념의 구별에 불과하다. 그래서 성인은 무위(無爲)하게 일에 처신하며, 불언(不言)의 가르침을 행하는 것이다. 만물을 생성케 하면서도 얘기하지 않으며, 생겨나게 하고서도 그것을 소유하지 않으며, 그렇게 되도록 하고서도 그것에 의지하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