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온五蘊 가운데 수受, 상想, 행行, 식識도 알아차림으로 작용하고 있으면서 기억을 만들고, 만들어진 기억으로 현재를 재구성하면 있으면서 기억을 만들고, 만들어진 기억으로 현재를 재구성하면서 다시 기억합니다. 감각지각을 깨워 대상을 받아들이는 수受, 그것의 이미지를 그리는 상想, 수와 상의 지각을 이어가면서 차이를 형성하여 알게 하는 행行, 앎인 식識, 이 모두에 깨어 있음과 습관적인 인식이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진여와 생멸이 함께 있는 것이지요. 감각지각이 깨어날 때의 깨어남은 새로운 알아차림의 전조이지만[正念], 그것의 반응 양상이 습관이 되면서 과거의 기억을 재구성하는 것이 되므로 현재에 깨어 있지 못한 마음이 되고 맙니다[妄念]. 상想과 행行 그리고 식識도 마찬가지입니다. 알아차림에서 보면 깨어 ..
알아차림이 분명해지면 기억도 무상한 현재와 더불어 새로운 인식이 됩니다. 새로운 알아차림은 망념을 만들지 않으므로 과거의 기억이 현재를 지배하지 않는 알아차림입니다. 이와 같은 앎을 '무념無念'이라고 합니다. 무념을 추구推求하는 것이 행복과 평화를 이끌어 냅니다. T1000.0 : 알아차림이 분명해지면 기억이 현재를 지배하지 않는 알아차림. 다른 이에게 싫은 소리를 할 때에도 내가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서 싫은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고 싫어하는 마음을 알아차리고 그 마음과 상관없이 필요하다면 싫은 소리도 하는 것. 싫어하는 마음으로 싫은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평안한 마음으로 싫은 소리를 하는 것이 알아차림의 행동일 터. 무념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생각 없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생각에도 머..
56 생멸문으로부터 진여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총괄하여 설명하겠다. 오음인 색과 마음, 그리고 육진 경계를 이리저리 온갖 방법으로 추구해 보아도 필경 망념은 없다. 왜냐하면 마음에는 형상이 없어 아무리 구하려 해도 결국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비유컨대 사람이 길을 잃어 동쪽을 서쪽이라고 하더라도 실제로 방향 자체가 바뀌지 않은 것과 같다. 중생도 그와 같다. 무명에 의해서 연기각성을 자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마음이 망념이 됐으나, 마음 그 자체는 언제나 앎으로 있으면서 들뜬 것이 아니다. 만약 이와 같은 것을 관찰하여 마음에 망념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면 곧바로 진여문에 들어간다. T1000.0 : 본래 방향[本覺] 방향을 잃다[무명/망념] 방향을 찾다[始覺] 방향이 틀리면 속도는 의미가 없다.
법신이 형상과 형상 너머를 인연 따라 나타내고 있습니다. 법신과 마음과 몸은 애초부터 나눌 수 없는 한 몸입니다. 그렇기에 인연으로 드러나는 앎이 관계의 그물망에서 깨어 있는 작용을 하게 됩니다. 형색으로 드러나는 관계가 '마음'이면서 '지성智性'이 되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도 세상도 모두 법신인 연기의 각성 곧 지성의 작용하는 것으로 하나입니다. 무엇이 아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이 전부입니다. T1000.0 : 산다는 것이 무한한 공덕의 나눔이다. 숨쉬는 것은 공기의 덕이고 보는 것은 빛의 덕이고 나무와 태양과 물과 모든 이웃들과 하나로 이어져 관계를 맺으니 산다. 하나가 아니고선, 하나로 이어진 관계가 끊어져선 살 수가 없다. '나'라고 하는 것은 무한한 공덕의 나눔이다. 내가 있어 사는 것이 아..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의 다름과 그 생각에 기뻐하거나 속상해 하는 것만으로는 마음자리를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나'는 왜 이런지 모르겠어."라고 할 때의 '나'는 생각하는 나를 '나'라고 여기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하는 나'로서 동일시하고 있는 '나'는 본래 생명으로서 마음이 아닙니다. 나타난 형상과 기억된 분별이 만들언 낸 매어 있는 '나'입니다. 그것에서도 법신이 떠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법신을 볼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생각은 법신에서 법신을 떠나 있는 것과 같습니다. 법신은 한계와 한계 너머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것으로 어떤 색상으로도 나타나지만 그곳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형색에도 머물지 않는 어떤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형색으로 드러남과 동시에 형색을..
아는 만큼 보인다. 마음 만큼 보인다.
귀신은 있다. 귀신은 없다. 귀신은 있다.
오면 오는 대로 알고 가면 가는 대로 알 뿐, 대상에 현혹되어 그것으로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상이 앎을 그것으로 알게 하는 것 같아 앎이 대상 따라 빨강 또는 파랑으로 아는 것 같지만 그냥 알 뿐, 빨강도 아니고 파랑도 아닙니다. 빨강 일때는 그것이 전부인 양 알고 파랑일 때는 그것이 전부인양 알며, 아무런 대상이 없을 때는 침묵이 전부인 양 그렇게 있지요. 어느 것도 다 비추지만 어느 것에도 따르지 않는 것이 진여인 마음의 작용입니다. 자신이 색깔을 갖지 않기에 머물지도 않습니다. 앎에서 보면 빨강이 생겨난 것 같지만 빨강이라는 앎은 생겨나는 것이 아니며, 파랑이 오면 빨강이 사라진 것 같지만 사라진 그자리가 파랑이 되니 앎이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침묵의 앎은 모든 색이 사라진 것 같지만 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