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림 없이 알아차리고 있는 마음은 단지 지켜보고 아는 것만이 아니라 아는 내용을 마음이 결정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마음이 대상을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식 결과를 대상으로 삼고서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며, 나의 것으로 인식되었기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집착이 대상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마음이 만든 영상을 붙잡고 있는 것이며, 집착하는 것이 마음의 자기 표현이라는 것이지요. 이 때문에 경계가 마음의 영상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때 허망한 경계의 실상이 보이고, 그 경계로부터 자유로운 대상보기를 할 수 있습니다. T1000.0 : 있는 그대로를 본다고 함은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인데 떠오르는 마음은 인연의 총상總相이면서 또한 마음이 만든 영상이다. 이 영상을 붙잡는..
제자가 말했다. "한 가지 질문이 더 있습니다. 당신은 매서운 눈의 선사라면 세 가지 종류의 깨달음을 구분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선은 엄밀히 말해서 구분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아닌가요? 선의 세번째 조사인 승찬선사도 '구분하지 않는다면 도에 이르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요?" 선사가 말했다. " 첫번째 깨달음, 본래의 깨달음, 최종적인 깨달음, 이것들은 같은가, 다른가?" 그 제자는 잠시 생각하다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벽은 하얗고 바닥 깔개는 파랗습니다." 선사가 말했다. "그대는 색깔에 집착하고 있다." "색깔에 집착하고 있는 것은 바로 당신입니다.!" "개가 뼈다귀를 쫓는구나." "그렇다면 그 세가지는 같은가요, 다른가요?" 선사가 말했다. "벽은 하..
"나는 아직 분명히 이해되지 않습니다. 다른 예를 들어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좋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지금 섹스를 하고 있다. 그들의 마음은 섹스 속에 사라지고 그들은 매우 행복하다. 그때 한 강도가 총을 들고 들어와서 말한다. '돈을 모두 내놔!' 그들의 행복했던 감정은 모두 사라지고 공포에 질린다. '오, 살려주세요!' 이것이 바로 작은 마음이다. 그것은 외부의 상황이 변함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 다음, 어떤 사람이 만트라를 외고 있다. 이것이 한 가지의 마음이다. 그의 마음은 전혀 동요하지 않는다. 안도 없고 밖도 없다. 오직 진정한 공의 세계만이 있을 뿐이다. 강도가 나타나 '돈을 모두 내놔'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사람은 겁을 먹지 않는다. 오직 옴 마니 받메 훔, 옴 마니 받메 ..
인연 자체가 분별될 수 있는 틀을 만들고 있으므로 무명의 의한 세계 해석이 가능하지만, 곧 인연이 제 나름대로 세계를 해석해서 보여주지만, 다른 한편 무상한 인연이므로 인연마다 틀을 만들면서 동시에 틀을 해체하고 있다고 해야겠지요. 인연의 무분별을 틀의 해체라고 본다면 인연의 분별은 틀을 만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틀이면서 틀일 수 없는 인연에도 깨어 있어야 하지만, 틀의 연속인 기억에도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는 마음이 인연을 바르게 해석하는 마음이면서도, 인연이 만들고 있는 분별에 흔들리지 않는 마음입니다. 넓고 깊은 인연의 어울림을 아는 마음, 곧 해석하는 마음이면서, 그 해석에 머물지 않으니 아무 것도 모르는 마음과 같습니다. 모르는 데서 보면 언어의 해석 너머에 인연이 있는 것 같고..
업이란 무명과 허망한 마음이 남긴 자취 곧 망념의 총합이라고 할 수도 있고, 남겨진 망념에 의한 인식의 습관성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업의 과보를 받는다는 것은 망념과 망념의 경향성이 계속해서 나와 나의 것을 기억하고 집착하면서 그것에 의해 아픈 미래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생각마다 자신이 만들고 있는 세계에서 자신이 매여 있는 삶입니다. 망념에 의해 허망한 경계가 끝없이 이어지고, 허망한 경계가 망념의 습관을 키우므로, 망념과 집착이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T1000.0 : 업은 망념의 총합으로 인연의 총상인 한 마음이 업의 의해 포획되어 업식대로 살게 되면 인연의 총상을 등지게 된다. 일어난 마음이 인연의 총상이기도하고 망념의 총합이기도 하니 망념의 경향성을 멈추고[止] 인연의 총상을 관觀할 때 ..
우리 모두가 좋은 습관과 나쁜 습관을 가지고 있어. 이 자체는 문제가 되질 않아. 찰나 찰나 오직 맑은 마음 상태를 지키면 올바른 행동이 자연스레 나와. 이걸 우리는 올바른 업이라고 하지. 선업이니 악업이니 말하지 않아. 좋고 나쁨의 경계를 넘어선 거야. '하늘은 푸르다', 좋은 거야 나쁜 거야? 좋고 나쁨의 차원이 아니지? '물은 흐른다', 좋은 거냐 나쁜 거야? 이 역시 좋고 나쁨의 차원이 아니야. 좋다 나쁘다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이름일 뿐이야. 착한 행동을 하면 죽어서 천당에 가고, 나쁜 행동을 하면 지옥에 가. 그러나 찰나 찰나 맑은 마음을 지니면 올바른 행동만이 나타나서 천당과 지옥에 걸리지 않게 돼. 이것은 생사를 초월하고 일체 중생만을 위하는 보살행이야. 제일 중요한 점은 '왜 ..
안으로 안으로 자신을 보라 그렇게 되면서 내부의 앎이 진여의 빛을 보지 못하게 되므로, 마음 작용이 밖으로 치달려 마음 밖의 대상을 헤아리면서 망념의 상속을 더욱 굳건히 합니다. 이것이 허망한 경계[妄境界]인 '육진六塵'의 훈습입니다. 우리의 의식이 늘 밖의 대상을 살피고 그것을 가지고 시비是非, 선악善惡, 호오好惡, 염정染淨 등의 분별을 일삼고 있는 것이 망경계의 훈습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허망한 육진 경계가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 내적으로 그렇게 분별하도록 되어 있는 무명의 분별력에 의해서 세워진 자아와의 상관관계에서 육진 경계이므로, 경계에 대한 선악시비 등은 집착된 무명이 분별력이 의식으로 나타난 것일 뿐입니다. 자신이 드러낸 경계를 다시 분별하고 있는 것이지요. 상속된 업식의 흐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