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자라고 한다고보면 어떤 한곳에 존재해야 되는데 파동이라고 하면 동시에 이 전체 방에 동시에 존재해야 된다. 전자가 어디 있느냐하는 것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하나의 전자가 이방 전체에 있는데 그것이 발견될 때는 아주 작은 거의 공간을 점할 수도 없다는 식의 작은 한 점에서만 발견된다. 이것이 발견되는 순간 다른 모든 곳의 전자는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이 방안에 전자가 한 개 있다라고 했을때 발견되기 전까지는 방에 모든 곳에 있을 가능성이 있는데, 발견되면 다른 곳의 모든 전자는 사라져 버리고 한 곳에만 나타난다. 그렇다고해서 다시 전자를 그 위치에서 소강시키면 또 동시에 이방 전체에 존재한다. 그래서 저쪽에서 발견되면 여기선 사라진 전자가 저쪽에선 똑같이 전자에 정보를 갖고 발현되는 것처럼 제팔식이라고..
"우주 전체 에너지라고 부르더라도 그 전체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은 에너지라고 하는 전체적인 의미로써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고 그것이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모든 변화들을 구성해 내는 그런 장으로 존재한다. 에너지 장이라고 할지라도 그 자체가 끊임임없이 생성소멸하면서 변화를 계속해 가는 것을 우리는 無相이라고 부른다. 개개인이 갖고 있는 이 팔식의 장이라 하는 것도 무상하기 때문에 매찰라마다 생성소멸한다. 찰라마다 생성소멸한다는데 우리가 생각할때 삶과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성격으로 완벽하니 달리해서 생한 것은 무엇이 드러난 것이고 멸한 것은 뭣이 아주 없어져버리는 것처럼 생각하면 안된다. 생이라고 하는 것은 수소 두개와 산소가 만나서 물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물이 생성되는 것인데 수소와 산소속에는 물이라고 ..
스피노자의 에서 모든 것은 실체와 양태들인데, 현대물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에너지와 물질은 그 모양만 달리한 것으로 동일한 것이다. 즉 허공이라든가 책상이라든가 하는 여러가지 것들이 모양을 달리하고 있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 에너지라고 하는 측면에서는 동일한 양상이라는 등가원리가 아이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다. 스피노자는 실체를 신으로, 양태를 실체의 변용으로 보았고 모든 것은 실체와 양태들이라고 하였다. 에너지 차원에서 보면 모든 것이 다 동일한 처럼 보이지만 그 에너지를 나타내는 모든 양상들은 다르다. 이는 실체의 변용이라는 측면에서는 다르지만 실체의 측면에서는 다른 양상으로 동일한 것이다. 스피노자는 실체란, "그 자체 안에 있으며 그 자체에 의해서 파악되는 것, 즉 그것의 개념을 형성하기 위하여 다른 ..
"善心所는 반드시 자기도 좋아야한다. 선이라고 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배푸는데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고 선을 행할때 행하는 자가 반드시 결과가 내적으로 좋아야 하고 그 결과가 다른 사람에게도 좋아야한다. 담에 동시에 다음 찰라에도 좋아야 한다. 그래서 시간을 두고 그것이 좋은 결과를 불러 일으켜야만 선이 되는 것이다. 저 사람에게 좋고 나에게는 안좋거나 나에게는 좋고 저사람에게는 안좋거나 오늘은 좋았는데 내일은 안좋거나하는 결과를 갖고 오면 그건 선심소가 아니다. 그래서 좋은 일은 함께 살고 있는 장 전체가 같이 좋아질 뿐만 아니라 그것이 다음 찰라에도 좋은 결과를 불러일으킨다." T1000.0 : 마음 작용이 선심소를 일으키도록 삶을 산다면. 직업을 택할 때 이와 같이 하고, 계약을 성사시킬..
"변행이라고 하는 것은 촉,작의,수,상,사라고 하는데, 촉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인연처에서 그 根들이 스스로 자기변화를 계속하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가 살 수 있기 때문에 그러면서 그것이 무엇인가 意, 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촉이 일어난 쪽으로 의를 기울려서 그것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여서 그것이 무엇인가하는 한계지운 영상을 만들어내면서 그 영상을 지속적으로 유지해 가고 생각하는 이 다섯가지가 촉, 작의, 수,상,사라고 하는 심소가 처음 변행심소." T1000.0 : 내가 이해한 대로 말하면, 마음은 마음이라는 場과 마음 작용이라는 所가 있는데 이 마음 장소의 장을 心王이라하고 마음 작용을 心所라고 하는데, 마음이 있는 곳엔 변행심소가 늘 작용한다. 이 과정은 생명활동이며 이 활동 속에서 자..
자아의식은 생명활동의 마음작용인데 생명활동의 변화를 相을 지어 인식하게 됨으로 앎이 생기고 앎을 통해 생명을 이어가는데 이 상을 분별하는 것이 意다. 즉 상과 의가 없으면 생명을 이어갈 수가 없다. 그런데 변화 속의 상을 그 자체로만 파악한 意는 그것을 소유할 대상을 만들어 스스로 자아의식이 된다. 이러한 과정은 우리가 어떻게 앎을 형성하는 가라고 물을 때 알게 되는 것으로 묻지 않는다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관계 속에서 파악하지 않으면 안될 것을 관계는 다 지우고 그 자체만 남겨 소유하게 되면 나머지가 소외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헌데 그 자체만를 소유하려하면 본래 소유할 수가 없을 뿐 아니라 그것으로 관계 속에 있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소외시키는 역현상이 자동 벌어져 스스로 괴로워..
"이 10이라고 하는 말을 쓰는 순간 0에서 10이라고 하는 관계중에서 0은 사라져버리고 10만 남게 인식되서 10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현상을 만들어서 대상을 이해하게 하는 힘을 法化된 힘, 즉 종자라고 부른다. 근데 이 10을 알아채는 것이 무상한 삶을 살아가는 즉 자기 생명을 살아가기 위해서 너무나 중요한 일인데 그러기 때문에 이것이 뚜렷이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意는 우리가 지식 한계, 한계에 갇힌 틀을 동시에 만든다. 의는 無明에 상대되는 明이 특징이 있고, 그 무상한 변화가운데 다름을 명확히 알아야하는 그런 명이 있고 동시에 그 다름으로써 무엇을 속성짓는 무명이 있다. 의라고 하는 것은 동시에 명이면서 그 자체가 무명이 되버린다. 우리가 뭘 안다고 하는 것은 아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