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고 알아차리는 법계 인연이 스스로 시공간을 만들고 있으므로 앎과 이룸이 찰나의 순간에 온전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인연의 무상한 변화가 그 자체로 앎이 되고 이룸이 되면서 동시에 시간을 만들어 기억 속에 남은 앎과 이룸의 현재를 해체하고, 다시 다른 앎과 이룸으로 새로운 현재를 만든다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앎과 이룸 그 자체에 온전히 깨어 있는 한 순간이 이룸 없는 이룸, 곧 머물지 않는 이룸으로 단박에 닦는 것이 되면 , 깨달음 없는 개달음, 곧 이미지로 그릴 수 없는 깨달음으로 단박에 깨닫는 것이 됩니다. 법계의 실상에 계합하는 순간만이 온전히 법계의 앎과 이룸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계합하지 못한 앎과 이룸이라면 온전한 앎과 이룸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점차로 알고 점차로 이룬다는 뜻은..
- 정화스님 풀어씀, p168 온전한 알아차림이야말로 머묾 없는 현재를 영원히 사는 일이 되면서, 동시에 기억된 과거를 넘어서 과거와 미래조차 현재에 담아내는 순간이 되게 합니다. 그러므로 순간의 마음을 떠나서 영원을 사는 마음이 따로 없고, 영원을 사는 마음이 순간의 마음으로 드러나지 않는 경우도 없습니다. 일상에서 쓰고 있는 그 마음이 바로 순간과 영원을 동시에 살고 있는 마음입니다. 다만 순간을 위해 그 모습만을 기억하고 있는 기억의 특성을 잘 살펴 알지 못한다고 하면, 순간 밖에 영원이 따로 있는 것 같아 순간의 현재를 온전히 살지 못하게 됩니다. 또한 순간 밖에 영원이 따로 없기에 영원을 바라며서 영원을 등지는 기억과 알아차림이 되고 맙니다. - 비트겐슈타인, p.114 6.4311 죽음은 삶의..
알아차리는 마음은 법신의 본성인 머묾 없는 지혜를 쓰게 되므로 쓸수록 번뇌가 줄어들지만, 복을 구하는 마음은 복이라는 형상과 이미지를 갖게 되어 구하면 구할수록 인생의 짐만 늘어나게 됩니다. 형상을 갖지도 않고 형상 이미지에 머무르지도 않는 법신의 지혜와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복을 닦는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복을 구하는 마음이 복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그것으로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하나, 이것은 욕망하는 마음만을 붙잡고 있는 것과 같아 욕망을 내려놓지 못하게 하니, 복을 구하는 마음이 번뇌를 이루는 마음이 되고 만다는 것이지요. 복을 구하는 마음이 복을 구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고 구하려는 욕망을 키우는 꼴이 되므로 욕망하는 마음이 마음 밖을 떠돌게되며, 복을 얻었다 할지라도 욕망..
"제팔식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앎들은 제팔식도 이와같이 견분이 있고 상분이 있는데 종자와 근신과 기계라고 했습니다. 제팔식을 이야기할 때 항상 여러분이 먼저 떠올려야 할 것은, 종자라든가 이런 것이 굉장히 중요하지만 자칫하면 제팔식이라는 것이 경험이 잠재된 인식을 갖기 쉽다. 하지만 제팔식 아뢰아식은 잠재된 인식이 아니다. 그것은 떠올릴 때는 기세계와 얼마나 밀착되어서 아주 우리가 알 수 없을 만큼 밀착되어서 교류하고 있는 것을 우리 의식영역에서는 잡히지 않는 것이다. 기세계란 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도 또한 잡히지 않는다. 왜냐면 기세계는 한생각 일어나는 순간 기세계가 달라진다."
"처음에는 마음으로 무엇인가를 알아, 감수작용으로 뭔가 서로 받아들여서 그것이 무엇인가를 자기 인식 전문에 相을 만들어서 띄워 올리면서 연속 찰라가 행해지면 이름 붙이는 것까지 흘러간다. 이 상이 떠오르면 이 상이라고 하는 것은 상으로만 그치는게 아니고 동시에 이 상을 보고 있는 나라고 하는 의식을 불러 일으키게 만든다. 내가 대상을 대상으로 보는 순간 대상으로 부터 스스로 소외되어 나라고 하는 인식주체가 만들어 지는 것이다. 이 인식주체가 원래는 하나에 장면에서 연기적 상태로써 앎이라는 장이 형성됐는데 그것이 나 밖의 무엇으로 있다라고 여기는 바로 그 순간 인식장에서 나도 독립되서 나라고 하는 인식주체가 성립되는 것이다. 인식주체가 있어서 성립되는 것이 아니고 대상을 대상화 하는 순간 나도 대상으로부터..
"마음도 쉬고 언어도 쉬었을 때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 緣起的 虛忘分別이 보인다. 허망분별하니까 사는 것이 너무너무 허망한 듯 보이지만 그 허망분별이 보일때 비로소 온전한 생명활동을 하는 것이다. 왜 완벽한 깨달음을 이룬 후에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 허망분별이다. 허망분별은 원성실성 다음에 나온다. 순서를 말할때 변계소집성을 말하고 의타기성을 말하고 원성실성을 말하는데 실재로 살면서 허망분별이 완벽하니 이해되어 있고, 이해될 뿐 아니라 허망분별을 철저히 사는 때는 원성실성을 완전히 경험하고 나서일 때이다. 그것의 의미는 허망분별해야 부처님께서도 일체 인연처에서도 자기 삶을 고집하지 않고 망향관계에서 연기법을 드러내서 삶을 안온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만약 부처님께 삶에 자기 특성이 있어서 자기 특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