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平常心이 대단히 중요하다. 道가 무엇인가 했을 때 평상심이 도다. 극단적인 예로 부모들이 가장 마음 아픈 것은 자식이 어렸을 때 저 세상으로 가는 것이다. 그 애가 살아 있을때 잘 살아왔다고 합시다. 잘 살아왔는데 15~6세에 부모보다 먼저 갔다고 합시다. 그러면 지금까지 잘 살아온 것에 생각하면 부모에 마음은 더욱더 아프다. 자식이 죽었기 때문에 부모에 마음을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영향이 전혀 없다. 근데 부모는 스스로 아파한다. 근데 부모가 아파하면 자식은 불효한 자식이 된다. 근데 15년 살아올 때까지 부모에게 너무너무 잘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칭찬했다. 안밖으로 효도를 했다. 부모의 아픔에 결정적 영향을 준 현재적 인연은 그 아픔은 부모가 만들어 냈지만 자식이 되는 것이다. 부모가 아파하는 ..
"분별이 일어나면 意가 자아를 구성시킨다고 하는 것은 타인과 나는 다르다라고 하는 분별이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이 분별을 통해서 자기를 구성해 내기는 하지만 분별한 것을 보니까 자성청정심이 함께 어울려서 세계를 구성해서 생명활동을 하고 있다는 연기적 상황을 모르게 하는데 대해서는 의가 책임을 지고 있지만 그러나 그 의가 우리가 태어나는 세상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三界를 결정하는 힘은 아니다. 삼계를 결정하는 힘은 선악이고 삼계를 벗어나는 힘은 禪定力에 의해서 평정력이다. 平定心." T1000.0 : 요컨대 나를 만드는 것은 意이지만 나의 얼굴 내지 운명을 만드는 것은 善惡業이다. 내가 짓는 선악업이 나의 세계를 만드는데 선도 악도 떠난 평상심은 삼계를 벗어나게 한다.
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단상이 2가지 있었는데, 하나는 신수가 게송을 지을때 고민하는 모습이 세잌스피어의 햄릿을 떠오르게 한 것과 또하나는 에 나오는 대화들을 세잌스피어의 희곡처럼 대사와 지문으로 편집해 문학작품처럼 만들어도 어울릴 것같다는 생각이 하곤 했는데, 이번에 정화스님이 풀어쓴 을 보니 꼭 그와 같이 대사와 지문으로 되어 있어 놀랍고 반가웠다. 더욱이 우리말 문체가 아름답고 리듬이 살아 숨쉬듯 편하여 손꼽을 책이 아닌가 하는데, 이런 저런 이유로 그 중에서 내가 감명받았던 대목을 여기에 통채로 새겨본다. 을 맨처음 접하면서 크게 놀란 것이 육조 혜능이 글자를 모른는 일자무식 나무꾼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읽기도 어렵다는 경전을 아예 읽을 수도 없는 분이 육조가 되어 경이라고 칭송하는 이름이 붙여진 을..
밝게 알아차리는 마음의 세 가지 작용인 계정혜 삼학 또한 이와 같습니다. 법계의 인연상들이 순간순간 모습을 바꿔가면서 인연을 다 담아 낼 수 있는 것은 인연이 된 마음이 어느 순간에도 밝게 깨어 있기 때문이며(慧), 밝게 깨어 있는 인연의 마음은 인연의 변화를 온전히 받아들이면서 인연이 되므로 인연의 삶을 의심하지 않으며(戒), 인연의 흐름에 의해 마음이 움직이거나 어지럽게 디지 않으면서 인연의 흐름에 수순하게 됩니다(定). 이런 까닭에 어느 것에도 머묾 없는 반야의 지혜로 인연의 공성을 잘 알아차린다면, 분별된 이미지가 실재가 아닌 줄 알게 되므로 집착하는 마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분별상에 대한 집착이 없으니 인연의 흐름이 생명의 온전한 표현이라는 것에 대하여 의심이 있을 수 없으며, 분별상을 갖고 ..
그렇기에 번뇌가 있을 때는 깨달음이 없지만, 깨달음은 깨달음에도 머물지 않는 앎이기에 번뇌를 갖고 있는 상태가 있을 수 없습니다. 번뇌가 깨달음이라는 뜻은 번뇌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변해 깨달음이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분별해 갖고 있는 앎이 무상성을 회복할 때, 갖고 있는 분별상에 더 이상 머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알아차리는 마음에 의해 번뇌와 깨달음이 상대하는 분별상으로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곧 번뇌도 번뇌라는 실체를 갖지 않고 진여 자성의 알아차리는 마음 또한 번뇌를 떠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번뇌가 일어나는 순간 번뇌인 줄 알아차릴 수 있으며, 알아차리는 마음에 의해 번뇌가 번뇌로 작용하지 않게 되고 나아가 번뇌의 자성이 없는 줄 체득하게 되므로 번뇌가 있는 그곳에 깨달음이 있을 수 있..
그러므로 깨달음이란 변화의 순간순간에 깨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앎 그 자체의 속성, 곧 머묾 없는 변화가 앎이 된다는 것을 알아 집착하여 갖고 있는 허상을 내려놓고 번뇌를 여의어 함께 아름다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존재의 실상이 이웃 항들과 공감인 줄 알기 때문입니다. 개체로 나타나는 하나의 현상이 스스로를 해체하면서 다른 현상이 되는 것이 이웃 항들과의 공감으로 이루어지는 하나의 현상이라는 것을 보고 안다는 것이지요. 앎의 항상성과 개체의 무상성이 어울려서 항상하지도 않고 무상하지도 않는 것이 무상으로 현상을 나타내고 앎으로 기억을 남기므로 무상성과 항상성이 담보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변화에도 머물 수 없고 항상성에도 머물 수 없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앎의 기억에서 보면 머물 수 있는 것 ..
오직 온갖 이웃 항들과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변하는 그것이야말로 열린 생명계 전부일 뿐입니다. 열린 생명계이기에 어느 순간만이 생명계의 진정한 모습일 수 없으며, 어느 모습만이 생명의 진실을 다 나타낼 수 없습니다. 단 하나의 사건, 사물도 온전한 것입니다. 목표를 향해 이루어가는 과정으로 이해해야하는 과정은 없습니다. 찰나가 완성된 목표며 이미 이루어진 과정입니다. 이것이 법의 특성이며 생명들의 앎과 이룸입니다. 이루어가는 과정으로 원인을 삼고 이루어진 것으로 결과를 삼지만 생명 그 자체는 과정과 결과가 없습니다. T1000.0 : 따로 구할 것이 없다. 과정이 곧 결과이기 때문이다. 과정을 긍정하고 다시 과정의 긍정 그 자체를 긍정하면[긍정의 긍정 즉 이중 긍정하면] 결과는 이미 결과를 떠나서 이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