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과 사유와 수행이 계속 반복되면서 우리가 그 전에 이러한 것들 있는 것처럼 생각했는데 이러한 것을 구성하는 것의 근원이 이것과 이것의 만남에서 식이 나오는 게 아니고 안다라고 하는 장이 마치 전체적으로 있는데 특별한 인연처에서 A처럼 나오고 B처럼 나오고 C처럼 나오는 거예요. A와 B와 C라는 것이 있어서 만나서 그것이 안다라고 하는 장으로 일어나는 게 아니고 묘하게 이 안다라고 하는 것이 아까 불각이라고 했는데 불각이라고 하는 상태인데 우리의 의식으로 잡히지 않는 것인데, 그런 상태에서 A처럼 B처럼 C처럼 일어나고 사라진 것을 경험하게 되면서 궁극적으로 이것과 저것이라고 하는 것은 이것과 저것으로서 자기존재를 구성해 내는 어떠한 실체도 있지 않다라고 하는 것을 경험적으로 학습하기 시작해요. 그..
언어는 想을 만든다. 상이 없이는 살 수가[또는 알 수가] 없는데, 이 상은 意가 我[주체]와 法[대상]을 만드는 방식으로 새겨진다. 다시말해서의 저자들의 표현으로 말하면 언어는 "의미화"와 "주체화"를, 즉 의미화라는 意의 작용과 주체화라는 我와 法의 작용이 교차하면서 相이 새겨지는데 이 상이 바로 얼굴이다. 얼굴은 인간의 신체를 벗어나 모든 사물에도 적용되며, 이 얼굴이 상으로, 즉 이미지로 새겨진다. 그런데 이 상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얼굴이라는 것이 원래 하나가 있고 그것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얼굴이 만들어진다는[생멸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즉 얼굴은 없으며 또한 얼굴이 없는 것도 없는 것이다. 비유로 말하면 얼굴은 안개처럼 있는 듯 없는 것[또는 없는 듯 있는 것]이다. 얼굴과 상..
나를 힘들게[또는 화나게] 하는 것은 바로 나다. 그가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고 그를 정상으로 봐주지 못하는 내가 나를 힘들게 한다. 그렇다면 정말 나는 옳고, 그는 그른가? 예를 들어 아들이 며칠전에 선물받은 고급잠바를 잃어버리고 왔다. 습관적으로 잃어버리는 아들에게 화가 났다. 잃어버린 것은 잘못이고 그것을 탓하는 나는 옳지 않은가? 그런데 뭐 잃어버릴 수도 있지 하고 생각한다면 화가 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일단 화가 나는 원인이 그에게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다음으로 무엇을 잃어버리는 것은 정말 잘못인가? 혹 그 잠바가 고급잠바가 아니고 싸구려 잠바라도 화가 났을까? 즉 나에게는 고급잠바라는 이미지가, 그 광고 효과가 나에게 새겨져 갖고싶고 없어지면 화가나도록 만든 이미지에 사로잡힌..
"전변이란 말은 매순간 변화한다는 말인데 변화한다는 두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같은 것이 다른 상태로 된다는 뜻이 있고 하나는 매 순간 다른 것이 된다는 말이 있다. 識이라고 했을때 식이라고 하는 어떤 것이 계속 전에도 있었고 그 식이 변해서 다른 식이 된다라고 생각하면 이것은 잘못 이해한 것이다. 매순간 앎이라고 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 일어나고 있는 것 자체가 총체적으로 다른 것이 된다. 전찰라와 후찰라가 완전히 다른 것이 되는데 그 다른 것이 안다라고 하는 사실로 나타난다. 변화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 생각에 어린이가 어른까지 되어가는데 그 어떤 것은 있으면서 점점 변해서 어른이 되간다고 하는 식의 변화가 아니고, 아예 통체로 어린이와 어른과는 다른 상태가 되가는 것이다. 그래서 唯識이라고 하..
"대상이 비었건 대상이 있건 상관없이 아직 주체적 상황으로 보고 있을 때는 이것이 독전적 자아인 것처럼 존립한다. 이때까지도 유식실성을 제대로 못본 것이다. 그러나 계속보게 되면 이 자체가 인연처에서 모두 들어가서 허망한 자기모습을 한번도 고집하지 않고 알맞도록 변해서 생명할동을 보고 있는데 그러한 생명활동이야마로 참으로 본질이다. 그것이 자기를 쉬고 모든 것이 어울려져서 함께 나눔으로 있는 것 자체가 진여가 된다. 허망은 언듯들어서 안좋은 개념처럼 부르지만 이것이야말로 삶을 진실하게 표현해 낼 수 있는 바탕이다. 그리고 그 성품은 여기서 항상 같다라고 했는데 항상 같다라고 하게되면 전후찰라가 동일하게 보이는데 전후찰라가 동일하다. 어떻게 전후찰라가 한번도 자기 모습을 동일하게 유지하지 않는다라는데서 동..
생이 있고 멸이 있으면 그것으로 끝이지만, 생이 있고 멸이 있고 그것으로 다시 생이 있고 멸이 있으면 생도 없고 멸도 없는 불생불멸의 영원한 흐름이 지속된다. 생멸의 찰라는 한찰라의 생멸이 생이 곧 멸이고 멸이 곧 생으로 작용하면서 매찰라가 새로움이다. 그런데 이 새로움을 버리고 이미 멸한 전찰라의 생을 고집하면 과거의 생을 지속하게 되므로 삶의 본래 흐름을 이탈하게 되어 괴로움이 생긴다. 찰라찰라가 그러하듯이 우리의 생을 이와 같이 사는 삶이란 생하는 것을 소유하지 않고 즉 멸로 가도록 긍정하는 것이다. 즉 내려놓는 것이다. 그래야만 매순간을 새롭게 살 수 있다. 에서 말하는 성인의 삶이 꼭 이와 같다. 그러므로 성인은 함이 있어도 함이 없는 것[無爲]으로 처신하며, 말로 할 수 없는[不言] 가르침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