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식은 지천에 깔렸는데 다만 보지 못할 뿐이라고 하는데, 정말 그렇구나. 매번 보는 글인데도 보이지가 않았다. 쾌락이 욕망의 내재적 과정을 중단한다고 생각했는데, 욕망은 쾌락 속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음을 깨닫는다. 이를 잊지 않기 위해 길지만 깊이 감사하며 글 전체를 인용한다. 인용하는 책은 법륜스님의 (정토출판, 2012)이다. 세상을 물들이는 사람. 첫 번째와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 부류의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첫 번째 부류는 바다에 빠지고 싶지 않은데 빠져서 괴로운 사람이고, 두 번째 부류는 바다에 빠지지 않기 위해 방파제를 쌓아놓고 그 안에서 노니는 사람이고, 세 번째 부류는 그 배를 타고 자유로이 놀면서 바다에 빠지지 않는 사람이다. 이 세 부류 사람들 모두 바다에 빠지지 않는 ..
마조히스트의 고통은, 쾌락에 이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욕망과 그 외재적 척도인 쾌락을 잇는 사이비 결속을 해체하기 위해 그가 치러야만 하는 대가다. 쾌락은 오직 고통이라는 우회로를 통해서만 얻어낼 수 있는 어떤 것이 결코 아니다. 쾌락은 가능한 한 지연되어야만 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긍정적 욕망의 지속적 과정을 중지시키기 때문이다. 마치 욕망이 그것 자체와 그것의 명상으로 채워져 있듯이, 욕망에 내재하는 기쁨이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는 결여나 불가능성을 의미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쾌락에 의해서 측정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바로 이 기쁨이야말로 쾌락의 강렬도들을 분배하고 그것들이 공포, 수치, 죄책감으로 뒤덮이는 것을 막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마조히스트는 기관없는 신체를 구성하고 욕망의 ..
흐름을 붙잡으려 말고[집착] 흐름을 중단시키지 말고[쾌락] 다만 흐르게 하라.[욕망하는 생산]
추세추종은 차트를 이용하는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차트를 이용하는 것은 서핑과 조금 비슷하거든요. 좋은 파도를 포착하기 위해서 조류와 공진에 관계된 물리학이나 유체역학 등을 알 필요는 없잖아요. 언제 좋은 파도가 일어나는지 느낄 줄 알고, 정확한 시점에 행동을 취하는 추진력이 있으면 되는 것이죠. 시장에서 주가가 왜 오르는지 왜 내리는지는 정확히 할 수 없다. 시장은 원인들의 무한한 연쇄이며 우리는 그것이 어떤 질서로 형성되는지, 불확실성의 원리처럼 알 수가 없다. 즉 우리는 모른다. 허나 이 모른다를 직시하고, 우리가 시장이 내리고 오르는 결과만을 의식할 수 있을 뿐임을 안다면 비로소 시장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세이코타가 말하고 있는, 파도를 자유롭게 즐기는 서핑의 달인처럼.
1. 대상을 본다는 것은 상을 본다는 것이다. 그 상은 마음이 짓는 것이다. 그 상이 마음 밖의 존재[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그 상과 마음은 하나이다. 상을 고집한다는 것은 곧 마음을 고집한다는 것이다. 즉 주체와 대상은 하나다. 존재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사물은 그저 사물일 뿐이다. 상을 짓거나 거부하는 것은 인간의 영역, 마음이다. 존재를 말할 수 있는 자 누구인가?라고 물어라. 2. 마음은 신체의 관념이다. 이 관념이 상인데, 상은 오온과 12처와 18계가 원인과 결과를 이루며 굴러 생기는 결과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어떤 질서로 구르는지 모른다. 우리는 그 굴림의 결과만을 의식한다. 그런데 우리는 결과인 의식을 원인으로 착각한다. 내가 의식한다, 내가 원한다, 내가 한다, 내가 ..
** 그 뜻을 마음에 새기고자 여기 블로그에 인용한다. 출처는 정병조 옮김, 한국불교연구원출판부, 1978. p27. 주3. 혜능이 홍인의 뒤를 잇고 육조가 된 후, 오조의 문인중 신수일파의 시기를 입고 남쪽으로 피신했다는 기록이 이 단경에 실려 있다. 그때 혜능이 법성사에 이르렀을 때 몇몇 승려들이 나뿌끼는 깃대를 두고 논쟁을 벌인 일이 있다. 즉 깃발이 흔들림이냐, 바람이 불어서 움직임이냐 하는 다툼이었는데, 그때 혜능이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요,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며,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라고 설파한 적이 있다. 이때 법성사 주지였던 인종스님이 혜능의 비범함을 알아 보게 되었다고 하낟. 부용거사는 혜능의 다른 이름.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보지 ..
** 그 뜻을 마음에 새기고자 여기 블로그에 인용한다. 출처는 정병조 옮김, 한국불교연구원출판부, 1978. p23. "선지식이여, 무릇 선하다든지 악하든지 하는 생각을 하지 말라, 바로 이러할 때에 어떤 것이 그대의 본래면목인가?" 이것은 혜능이 오조의 법을 얻고 남쪽으로 피신할 때, 의발을 강탈하러 따라온 혜명이라는 스님께 던진 혜능의 말이다. 일반적인 해석방법에 의한담녀 이 구절은 대단히 잘못된 판단임에 틀림없다. 즉 통념적인 계와 정의 해석방법에 대한 비판의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계란 선악을 분별하는 것이요, 정이란 마음을 한 곳에 집중시킨다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여기에 부연하여 설명되는 신회의 말을 다시 인용해 본다. "마음의 시비가 있는가." "없다." "마음의 가고 옴이 있는가." "없..
만약 자기 성품을 깨달으면 깨달음도 열반도 세우지 않으며, 또한 해탈했다는 생각도 세우지 않아서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어야 만법을 세우느니라. 이 뜻을 알면 이것이 곧 부처님의 몸이요, 깨달음이요, 열반이요, 또한 해탈지견이니라. 견성한 사람은 세워도 되고 안세워도 되며, 가고 옴이 자유로워 막힘이 없고, 걸림이 없어서 경우에 따라 작용하고, 말에 응하여 대답한다. 널리 화신을 나타내지만 자성을 떠나지 않으므로 곧 자재한 신통과 유희삼매를 얻으니 그것을 이름하여 견성이라 하느니라. 걸림이 없어서 경우에 따라 작용하고. 이 말은 법성게에 나오는 불수자성 수연성을 떠올리게 하는데, 스스로의 성품을 지키지 않고, 인연을 따라 이룬다에서 "인연을 따라 이룬다"와 "경우에 따라 작용하고"를 겹쳐 생각해보면 좋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