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풀고 받는 인과의 멍에속에 있는 자비는 온전한 것이 아니다. 베풀어도 베푼 바가 없고, 받아도 받음없어야 인과의 멍에가 끊어지니. 태양을 보라. 베풀어도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는] 베푼 바 없는 저 태양. 받아도 [우리는 다만 감사할 뿐이다.] 받음없는 저 태양. 저 태양의 [글자그대로의] 무심(無心)을 품자. 태양처럼 감히 쳐다보지 못하는 더없는 공덕이 무심에 있고 지복은 [인과의 멍에속에서] 인과의 멍에에 메이지 않는 무심행 그자체에 있다. (무심행이야말로 마술[기적]이 아닌가. 있어야 할 것이 있지 않으니 말이다.) 생멸 속에서 생멸이 없는 마술, 그 기적의 향유가 바로 지복(至福)인 것을.
선지식이여, 내게 무상송이 하나 있으니 각각 외워 가지도록 하라. 세속에 있는 사람이나 출가한 사람이나 모두 이대로 닦을 것이니 만약 스스로 닦지 않고 오직 나의 말만 기억한다면 아무 이득이 없을 것이다. 나의 게송을 잘 들으라. 말로 통하고 마음이 통함이여 해가 허공에 있음과 같으니 오직 견성하는 법을 전하여 삿된 가르침을 쳐부수리. 법에는 빠름과 늦음이 없지만 어리석고 깨달음이 빠르고 더딜 뿐. 다만 이 견성하는 문을 어리석은 사람은 알지못하여 만 가지로 셜명하지만 이치는 모두 하나로 돌아가네. 번뇌로 가득차 어두운 방에 항상 지혜의 빛을 밝히라. 삿됨이 오면 번뇌가 일고 올바름이 오면 사라지리니 삿됨과 올바름을 쓰지 않으면 청정하여 무여에 이르리. 깨달음의 성품 가운데 마음을 일으키면 곧 망녕. 청..
불교의 눈으로 보면 기관없는 신체는 중도(中道)이며, 내재성의 장 혹은 일관성의 구도는 공(空)이다. 이 둘의 관계는 서로에 대한 증거로 이해할 수 있으며, 서로에 대한 이해를 더 높여준다.[양경쌍조] 또한 이렇게 생각되기도 한다. 중도와 공의 사상이 확장된. 기관없는 신체와 내재성의 장은 대승의 대승 혹은 대승의 바깥으로 여겨진다. 한 개인 또는 대중들 뿐 아니라 사회, 국가, 시스템의 해탈을 꿈꾸게 하기 때문이다. 나의 경험을 보면 나는 기관없는 신체를 먼저 만났다. 처음 그것은 이해가 되지않았지만 마술같은 매력에 이끌려 늘 나를 따라다니는 화두가 되었다. 화두를 쫒다가 중도와 공을 만나게 됐고, 그리고 중도와 공이 기관없는 신체를 이해할 수 있는 신체로 만든 것 같다. 위대한 개념은 내가 이해할 수..
: 손절매는 왜 어려운 가요? : 손절매는 굉장히 쉬운 문제입니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 볼 때 가볍게 할 수 있는 것이죠. 어떤 사태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가령 내가 뜨거운 감자를 손에 잡고 있다고 합시다. 이때는 "앗,뜨거" 하며 감자를 그냥 놓는게,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겠죠. 그런데 감자가 아까운 생각에 뜨거워도 놓지 못한다면 사태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아니죠. 사태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이유는 순전히 감자에 대한 미련 때문입니다. 집착이죠. 흔히들 본전 생각 때문에 낭패를 봅니다. 작은 손해를 피하려는 욕심에 더 큰 것을 잃죠. 주가가 내려가는 상황에서 다시 오를 거란 기대는 버리세요. 그건 집착이 붙잡는 망상이니까요. 다시 오르면 다시 사면 됩니다.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죠. 손절매가..
지혜는 따로 필요하지 않다. 최초의 지혜는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볼 때만이 대상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고 비로소 대상에 대한 지식이 생기고 지식을 활용하는 지혜가 생기고...한다. 지혜는 따로 필요 없다. 있는 그대로 보면 될 뿐이다. 반야심경도 이와 똑같이 말한다. "無智亦無得" 있는 그대로 보는 데 지혜가 따로 필요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 따로 얻을 것도 없다. 있는 그대로 보면 그뿐이다. 다만 그렇게 할 뿐이다. 다만 할 뿐이다.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선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거든 지혜를 구할 게 아니라 버려야 한다. 나에게 형성되어진 편견, 무의식, 업식을 내려놓아야 비로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있는 그대로를 보기위해 버린다는 ..
"쾌락이 뭐죠?" "공짜." "쾌락이 왜 나쁘죠?" "공짜가 아니니까."
다만 할 뿐은 다만 욕망할 뿐이다. 다만 할 뿐은 욕망의 내재적 과정을 중단하지 않는 것이다. 다만 할 뿐, 다만 욕망할 뿐은 어떤 결핍도 없다. 그러니 바라는 게 없다(無得). 바라지 않는다는 것은 외부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다만 할 뿐은 자신을 뛰어넘어 주어지는, 외부에 의존하는 쾌락을 멀리한다.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쾌락을 바라지 않는 이유는 쾌락이 욕망의 과정을 중단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 것도, 쾌락조차 바라지 않는 다만 할 뿐의 경우 "욕망에는 어떠한 결핍도 없고 욕망은 그 과정을 중단시킬 모든 쾌락들로부터 자유롭다." 그대 자유롭고 싶은가? 다만 할 뿐이다.
스피노자의 따르면 정신은 신체를 대상으로하는 신체의 관념인데, 때문에 명상은 정신을 통해, 즉 신체의 관념을 통해 신체를 바라보는 행위이다. 내가 나를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정신이 신체의 관념이란 신체와의 합일을 근간으로 하는 분리에 있다. 따라서 생각하는 나는 나 이전에 존재하는 의심할 수 없는 주체가 아니며 더욱이 생각하는 나란 곧 신체의 관념이기 때문에 신체와 외따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생각하는 나의 존재는 신체의 관념을 표현하는 언어를 통해 표상되는 허상을 주체로 호명하는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생각하는 나는 도대체 나의 신체의 의지나 욕구의 주체가 될 수가 없다. 생각하는 나가 나를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나는 실로 불가에서 말하는 색수상행식의 윤회를 통해 쌓인 업의 습관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