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인사이더들이 더 행복한 사람들은 아닐까요? 아웃사이더들의 삶은 필연적으로 고독한 삶입니다. 그들에겐 집이 없으니까요.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그들은 내면에서 자신들의 집을 발견할 수 있으니까요. 선생님은 이 집을 뭐라고 부르겠습니까? 자율, 자기존중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아웃사이더들이 향유하는 이점들은 무엇입니까? 남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다는 점인가요? 그렇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아웃사이더들은 자신들의 삶을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특별한 원리들에 의존하라는 어떠한 압력도 받지 않고 이끌어 갈 수 있습니다. 그들은 어떠한 이데로로기에도 헌신해야 한다고 생각지 않으며, 성찰할 수 있는 모든 기회들을 자유롭게 향유합니다. 아웃사이더들은 편견 없이 참여하고, 그래서 자기 앞에 나타나는 것을 지각할..
1984년 어느 날 나는 대통력의 봉인이 찍힌 편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피노체트와 점심을 함께 하자는 초대장이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사절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다른 사람들은 만찬에 참석하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나는 초대에 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어머니는 항상, 나에게 가족이 있음을 애원하며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잊지 않겠다고 어머니에게 약속을 했지요. 그에게 인사할 차례가 돌아왔을 때, 나는 큰아들이 자기는 결코 피노체트와 악수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런데 나는 거기에 있었고 이 남자와 악수를 했습니다. 우리가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피노체트가 다시 일어나 자신의 와인 잔을 들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조국을 위하여 건배!" 그리고 우리는 일어서서, 서로 잔을 권하며..
프란시스코 바렐라는, 생명의 조직에 전념한 선생님의 (궁극적으로 자기생산 이론으로 귀결된) 협력적인 이론적 성찰들을 칠레의 정치적 상황 속에 위치짓습니다. 공산주의자인 살바도르 아옌데가 대통력으로 선출되었고, 그렇게 되기를 바랐던 사람들은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신호들을 보고 싶어했습니다. 바렐라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면서 쓰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단연코 혁명적이고 비정통적인 여행을 막 시작했음이,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 필요한 용기가 칠레의 만연한 분위기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음이 분명했다. ...... 자기생산 개념의 출현을 낳게 된 몇 개월은 당시의 칠레와 실타래처럼 연결되어 있다." 딱 잘라 말하건대 나는 그와 생각이 다릅니다. 나는 혁명적이거나 비정통적인 입장을 갖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
산티아고로 돌아왔을 때 나는 프란시스코 바렐라를 도왔습니다. 하버드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그가 다시 칠레로 돌아왔을 때 내 실험실에 그를 위한 방을 마련해 주었던 것이지요. 생명체계들의 순환적 조직에 대한 내 생각들이 적실하다면, 그것들을 정식화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 틀림없다고 그가 어느 날 나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어떠한 정식화가 의미 있게 시도될 수 있기 전에 충분한 언어적 서술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완전히 파악된 것'만이 적실한 정식화로 표현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정식화의 도입을 위한 기준이, 우리가 그것을 전개시키고 적용시키는 것을 시작하는 시간 속의 지점이라는 것ㅇ르 의미하겠군요. 섣부른 정식화는 포괄적인 이해의 가능성을 박탈하고 우리의 사고를 가로막을 수 있..
소통이란 내가 상대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 나의 말을 상대가 잘 들어주는 것은 소통이 아니라 독재입니다. 소통은 상대의 말을 내가 잘 들어주는 것이에요. 남이 하는 말을 그대로 따라 하는 노예가 되라는 뜻이 아니라 상대의 말을 분별없이 이해하고 받아주면 그것이 소통이라는 뜻입니다. 부부지간에 소통이 안 된다는 말은 내가 상대의 말을 잘 안 받아준다는 뜻이에요. 아이와 소통이 안 된다는 말은 내가 아이의 말을 안 들어주고 있다는 뜻입니다. 아이가 내 말을 안 듣기 때문에 소통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내가 아이에게 독재자 식의 소통을 하고 있는 겁니다.”
칼은 날카롭다. 칼은 날카롭다는 것을 안다. 앎의 앎은 칼의 쓰임이 어떠해야하는지 윤리적 책임을 제시한다. 칼을 음식을 만드는 도구로 사용할지 범죄의 도구로 사용할지는 우리가 산출하는 세상이다. 2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어려움의 핵심은 바로 앎을 잘못 아는데, 앎을 모른는데 있다. 우리를 얽어매는 것은 앎이 아니라 앎의 앎이다. 폭탄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앎이 아니라, 우리가 폭탄으로 무엇을 하려하는냐가 그것을 쓰느냐 마느냐를 결정한다. 우리는 흔히 이런 깨달음을 무시하거나 못 보게 스스로 억누르면서, 우리의 일상행위에 대한 책임을 떠맡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우리의 행위는 (우리의 모든 일상행위는 빠짐없이) 세계를 산출하고 굳히는 데 이바지 한다. 우리가 타인과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세계를 ..
우리가 산출한 세계는 끊임없는 재귀과정 속에서 자신의 기원을 감춘다. 우리는 현재 속에서 존재한다. 과거와 미래는 현재를 사는 방식일 뿐이다. 세상의 이런저런 규칙성들에 (예컨대 우리의 가치나 취향 또는 주변 사물의 색깔이나 냄새 따위에) 우리가 익숙해지던 과정 중에 우리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지금 다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한 얘기다. 유기체의 역동성이 작업적으로 안정되는 방식에 이런 역동성의 발생과정이 구현되어 있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 생물학적 기제의 원리다. 생명활동은 자신의 기원에 대한 기록을 간직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란 기껏해야 세계를 산출하는 기제를 밝힐 설명을 언어로 내놓는 일뿐이다. 우리는 존재함과 동시에 인지적 '맹점'을 산출한다. 이것을 없애려면 ..
인생은 외줄타기.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 줄이 높아질수록 중심은 더더 중요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