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셋[根,境,識]에 의해서 형성된 '인연의 마음인 앎'은 그 순간의 앎으로 끝나는 앎이 아닙니다. 앎이 흔적을 남기니 기억입니다. 기억된 앎이 셋의 인연에 끼어드는 것을 무명의 바람이라고 합니다. 인연을 기억하는 앎으로 조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보면 무명이 나중에 형성되는 것 같지만 셋의 인연이 앎으로 자취를 남기는 것 자체가 무명이기에, 무명이면서 기억이 되고 기억이 무명을 두텁게 한다고 하겠습니다. 이 상태를 인연이 앎으로 작용하는 장면을 자각하지 못한 상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인연이 앎으로 드러나 스스로의 얼굴을 알리기만 할 뿐, 앎 그 자체의 형성이 인연인 줄 잊는 앎입니다. 근과 경이 만나서 생기는 앎이면서 앎 그 자체에 대해 무지한 앎이지요. 앎으로 드러나는 마음이면서 깨닫지 못한 마음입..
앎으로 드러나지 않는 인연은 없습니다. 다만 헤아리지 못한 광대한 인연의 앎이 우리의 의식 너머에서 작용하고 있기에 앎으로 드러나지 않는 인연이 있는 듯할 뿐입니다. T1000.0 : 인연의 總相이 마음이고 인연의 마음이 앎인데, 혹 우리가 일어난 마음을 자기도 모른다는 것은 한편 '우리의 의식 너머에서 작용하고 있기에 앎으로 들어나지 않는 인연이", 다시말해서 지은 바 인연을 모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마음에서 화가 일어난다는 것은 내가 지은 인연의 총상이다. 그런데 이 화를 내가 지은 인연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이 화가 화나게한 상대에게 있다고 원인을 돌릴때, 인연의 총상인 마음을 알되 잘못 알아[이를 전도몽상이라 하는데] 번뇌와 괴로움을 만들게 된다. 우리는 지은바 인연을 모른다.
'거울'도 '거울에 비친 모습'도 '앎'도 앎[識]으로 인해서 비로서 알려집니다. 알면서 동시에 알려지는 것이므로 앎은 스스로를 알려진 사실로 드러낸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앎은 거울이 아는 것도 아니고 모습에 의해 알려지는 것도 아닙니다. 거울과 모습이 만나 앎이 형성될 때 앎이 인연의 얼굴로 드러나면서 거울과 모습도 함께 알려집니다. T1000.0 : 있음에서 함으로. 있음은 오직 함을 통해 알려진다. 거울과 거울의 비친 모습은 거울과 모습을 있고 그것이 비친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비친 그 모습을 통해 비로서 거울과 거울의 비친 모습이 알려진다. 우리는 함의 세계를 살고 있으면서 있음의 세계를 고집한다. 또한 함이란, 앎이란 거울과 거울의 비친 모습이 둘이 아닌 하나일때만이 가능한 것으로 ..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은 마음으로 인연의 총상總相이 되면서도 다름을 담아낸 별상別相도 됩니다. 다름을 담아내는 마음의 다름이 인연이 되면서, 일어나고 사라지고 있습니다. 인연이 된 마음은 청정하지도 청정하지 않지도 않습니다. 상대되는 개념이 형성될 수 없지요. 마음 거울에 비친 모습들의 흐름이 마음을 마음이게 하면서 동시에 모습들을 모습이게 합니다. 마음도 모습도 거울 속에 함께 있지요. 함께 있는 마음과 모습이 자취를 남기는 것은 비추는 역할을 하는 마음이 아니라 비춘 것을 알아차리는 마음의 활동에 있습니다. T1000.0 : 스피노자식으로 말하면 우리는 원인들의 질서를 모르기에 결과만을 인식하게 된다. 여기서 원인들이란 원인들의 무한한 연쇄이며 불교의 용어로 말하면 인연이다. 따라서 원인들의 무한한 ..
아는 것이 무지무명의 작용을 이어갑니다. 그렇다고 무명의 잘못된 인식활동이 과거의 어떤 시점에서 시작되어 그 결과 지금의 의식 활동이 잘못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인식이 일어나는 지금 이 자리가 의와 의식의 분별이 생성되고 소멸되는 자리이면서 그것 자체가 무지무명의 현재라고 할수 있으므로, 지금의 마음작용에 깨어 있지 못한 것이 시작 없는 무명이면서 업식 내지 상속식입니다. T1000.0 : 흔히 말하는 지식, 지성은, 알되 바르게 알지 못하는 업식 내지 상속식으로 무명이다. 즉 아는 것이 무지무명의 작용을 이어간다. 알면 알수록 더 모르는 것임을 잊지말자.
일상의 의식에서 나의 존재 의식을 더욱 굳게 하는 분별과 타자들에 대한 다름의 이미지만을 쌓아가는 인식 내용이 강해진다는 것은 '견번뇌見煩惱'가 많아진다고 할 수 있으며, '나의 것'에 대한 애착이 커진다는 것은 '애번뇌愛煩惱'가 많아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견見'이란 나라고 여기는 견해에 의해서 나가 성립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나'가 분별에 의해서 그렇게 보이므로 나로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존재하는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이미지로 비쳐진 나를 보는 것이지요. 업식이 비춘 현식을 다시 보는 것입니다. 만들어진 '나'를 보는 것이므로 업식業識이라고 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쌓여 있는 나의 견해로 사물을 보는 습관을 업業이라고 하며, 업을 현행하게 하는 동력을 전식轉識이라고 하고, 나타난..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작용에 대해 만족과 불만족을 대비하지 않고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반면 자신이 만든 이미지를 가지고 사건, 사물을 본다는 것은 이미지와 맞고 틀린 것에 따라 만족과 불만족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평안한 보기와 불편한 보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지켜보는 습관보다는 이미지에 맞는가 틀리는가라고 분별하여 보는 습관이 편안하지 않는 마음과 집착을 형성합니다. T1000.0 : 이또한 어설픈 생각인지 모르지만, 있는 그대로 보기가 쉽지가 않다. 경험에 비춰보면 일어난 사태를 마음작용을 멈추고 보려할때 일어난 상황에서 마음 작용을 멈추려하기에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를 때가, 떠오르지 않을 때가 너무 많다. 특히 다른 사람과 관계하여 일이 일어날 때 마음작용을 ..
깨닫기 전까지는 생멸의 분별만을 보기 때문에 오염된 마음으로 청정하지 못하다고 할 뿐, 깨닫는다고 하여 다른 마음을 얻는 것이 아니며 알아차림과 분별과 기억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깨닫고 난 뒤에는 분별과 기억의 특성도 공성임을 체득하여 알기 때문에 분별과 기억에 매이지 않을 뿐입니다. 인연의 변화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마음이 인연의 변화가 되면서, 동시에 변화를 분별하고 분별된 기억이 인식의 대상인 줄을 분명하게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T1000.0 : 緣氣는 無常이며 무상은 中道이며 중도는 空이며 공은 因緣이며 인연은 곧 앎[識]이고 앎은 곧 마음이고 마음은 연기이고 연기는 무상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