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 수행을 근거로 한다면 열반涅槃이라는 개념도 상당히 달라지게 됩니다. 지계持戒와 선정禪定과 지헤智慧의 완성으로 열반을 성취한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생명연대에 대한 자각이 현재 인식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고 할 때, 보살 수행자의 처지에서 보면 자신이 갖고 있는 의意의 분별을 뛰어넘는 것은 일차적인 열반에 지나지 않습니다. 연기법에 대한 철저한 학습과 실천 의지가 보상의 의意가 되기에 보살 수행자의 열반은 모든 생명들의 열반이라는 연대적 생명관이 의意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열반의 완성을 생명계의 열반으로 확대하는 것이 보살의 열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살이 의훈습으로 열반을 속히 이룬다는 것은 자신의 생사를 떠나기 위해서 속히 열반을 성취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이웃 생명들에 대한 방편지를 ..
화엄에서는 생명마다 생명 그 모습 그대로 '총상으로서의 우주 생명[總相]'과 '낱낱으로 나의 생명[別相]', 생명연대로서 '같음[同相]'과 나의 모습과 너의 모습으로 이루어지는 생명활동으로의 '다름[異相]', 생성이라는 '긍정[成相]'과 소멸이라는 '부정[壞相]이 하나의 사건,사물 속에 오롯이 함께 있기에 그 가운데 어느 하나만을 가지고 삶을 볼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분별된 '나'와 분별될 수 없는 생명연대인 '우주'가 어울려, 분별 속에 무분별을 담고 무분별에서 분별을 만드니, 나와 너의 '다름' 속에 '같음'이 있고 같음 속에 다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같음과 다름이 함께 있으므로 다름들의 어울림이 가능하고, 어울림에서 느끼는 평안함과 사랑, 그리고 이웃 생명들에게서 받는 생명 나눔도 이루어질 수..
흔들림 없이 알아차리고 있는 마음은 단지 지켜보고 아는 것만이 아니라 아는 내용을 마음이 결정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마음이 대상을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식 결과를 대상으로 삼고서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며, 나의 것으로 인식되었기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집착이 대상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마음이 만든 영상을 붙잡고 있는 것이며, 집착하는 것이 마음의 자기 표현이라는 것이지요. 이 때문에 경계가 마음의 영상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때 허망한 경계의 실상이 보이고, 그 경계로부터 자유로운 대상보기를 할 수 있습니다. T1000.0 : 있는 그대로를 본다고 함은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인데 떠오르는 마음은 인연의 총상總相이면서 또한 마음이 만든 영상이다. 이 영상을 붙잡는..
인연 자체가 분별될 수 있는 틀을 만들고 있으므로 무명의 의한 세계 해석이 가능하지만, 곧 인연이 제 나름대로 세계를 해석해서 보여주지만, 다른 한편 무상한 인연이므로 인연마다 틀을 만들면서 동시에 틀을 해체하고 있다고 해야겠지요. 인연의 무분별을 틀의 해체라고 본다면 인연의 분별은 틀을 만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틀이면서 틀일 수 없는 인연에도 깨어 있어야 하지만, 틀의 연속인 기억에도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는 마음이 인연을 바르게 해석하는 마음이면서도, 인연이 만들고 있는 분별에 흔들리지 않는 마음입니다. 넓고 깊은 인연의 어울림을 아는 마음, 곧 해석하는 마음이면서, 그 해석에 머물지 않으니 아무 것도 모르는 마음과 같습니다. 모르는 데서 보면 언어의 해석 너머에 인연이 있는 것 같고..
업이란 무명과 허망한 마음이 남긴 자취 곧 망념의 총합이라고 할 수도 있고, 남겨진 망념에 의한 인식의 습관성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업의 과보를 받는다는 것은 망념과 망념의 경향성이 계속해서 나와 나의 것을 기억하고 집착하면서 그것에 의해 아픈 미래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생각마다 자신이 만들고 있는 세계에서 자신이 매여 있는 삶입니다. 망념에 의해 허망한 경계가 끝없이 이어지고, 허망한 경계가 망념의 습관을 키우므로, 망념과 집착이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T1000.0 : 업은 망념의 총합으로 인연의 총상인 한 마음이 업의 의해 포획되어 업식대로 살게 되면 인연의 총상을 등지게 된다. 일어난 마음이 인연의 총상이기도하고 망념의 총합이기도 하니 망념의 경향성을 멈추고[止] 인연의 총상을 관觀할 때 ..
안으로 안으로 자신을 보라 그렇게 되면서 내부의 앎이 진여의 빛을 보지 못하게 되므로, 마음 작용이 밖으로 치달려 마음 밖의 대상을 헤아리면서 망념의 상속을 더욱 굳건히 합니다. 이것이 허망한 경계[妄境界]인 '육진六塵'의 훈습입니다. 우리의 의식이 늘 밖의 대상을 살피고 그것을 가지고 시비是非, 선악善惡, 호오好惡, 염정染淨 등의 분별을 일삼고 있는 것이 망경계의 훈습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허망한 육진 경계가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 내적으로 그렇게 분별하도록 되어 있는 무명의 분별력에 의해서 세워진 자아와의 상관관계에서 육진 경계이므로, 경계에 대한 선악시비 등은 집착된 무명이 분별력이 의식으로 나타난 것일 뿐입니다. 자신이 드러낸 경계를 다시 분별하고 있는 것이지요. 상속된 업식의 흐름..
진여에서 보면 생겨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지만, 망념에서 보면 생겨나고 없어집니다. 그것이 마음 하나에서 일어나고 있기에 한마음[一心]이라고 합니다. 또한 인연인 마음은 '아는 마음'과 '알아차리는 대상'이 서로 다른 실체를 갖는 것일 수 없어 한마음이기도 합니다. 우리들이 쓰고 있는 마음작용의 하나하나에 진여와 번뇌가 함께 있으면서 법계연기의 총상이 되기도 하고 분별의 망상이 되기도 하기에, 한 생각 돌이키면 그 순간 인연의 무자성無自性에 눈뜨는 것이 가능하고, 그것 자체가 자신의 인연을 자각하는 것이므로 다시는 무명화하지 않는 지성이 늘 작용한다고 하겠습니다. T1000.0 : 마음 하나가 법계연기의 총상이 되기도 하고 분별의 망상이 되기도 하는데, 그렇담 중요한 행동은 무엇인가? 무주無住 무상無相..
기억된 이미지가 마음이 만든 것인 줄 확실히 안다는 것은 모든 것의 무상無相을 보는 것이며, 집착할 실재가 없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미지의 허구를 넘어서면서 이미지와 연계된 실재적 사고도 사라지는 것이지요. 이미지를 표현하는 언어와 형상이 자성이 없는 방편인 줄 알고 자성이 없는 공성임을 체득하여, 언어에도 걸리지 않고 형상에도 걸리지 않는 분별과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바른 판단인 지혜로 방편을 자유자재로 쓰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오염되지 않는 지성입니다. 생겨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면서 인연 따라 무상無相과 무념無念으로 알아차리고 있는 지혜의 근거입니다. 무상無相이란 형상에 매이지 않는 공성의 인연을 꿰뜷어 아는 것이며, 무념無念이란 망념이 만들어 놓은 언어 판단에 속지 않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