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생멸문으로부터 진여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총괄하여 설명하겠다. 오음인 색과 마음, 그리고 육진 경계를 이리저리 온갖 방법으로 추구해 보아도 필경 망념은 없다. 왜냐하면 마음에는 형상이 없어 아무리 구하려 해도 결국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비유컨대 사람이 길을 잃어 동쪽을 서쪽이라고 하더라도 실제로 방향 자체가 바뀌지 않은 것과 같다. 중생도 그와 같다. 무명에 의해서 연기각성을 자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마음이 망념이 됐으나, 마음 그 자체는 언제나 앎으로 있으면서 들뜬 것이 아니다. 만약 이와 같은 것을 관찰하여 마음에 망념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면 곧바로 진여문에 들어간다. T1000.0 : 본래 방향[本覺] 방향을 잃다[무명/망념] 방향을 찾다[始覺] 방향이 틀리면 속도는 의미가 없다.
법신이 형상과 형상 너머를 인연 따라 나타내고 있습니다. 법신과 마음과 몸은 애초부터 나눌 수 없는 한 몸입니다. 그렇기에 인연으로 드러나는 앎이 관계의 그물망에서 깨어 있는 작용을 하게 됩니다. 형색으로 드러나는 관계가 '마음'이면서 '지성智性'이 되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도 세상도 모두 법신인 연기의 각성 곧 지성의 작용하는 것으로 하나입니다. 무엇이 아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이 전부입니다. T1000.0 : 산다는 것이 무한한 공덕의 나눔이다. 숨쉬는 것은 공기의 덕이고 보는 것은 빛의 덕이고 나무와 태양과 물과 모든 이웃들과 하나로 이어져 관계를 맺으니 산다. 하나가 아니고선, 하나로 이어진 관계가 끊어져선 살 수가 없다. '나'라고 하는 것은 무한한 공덕의 나눔이다. 내가 있어 사는 것이 아..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의 다름과 그 생각에 기뻐하거나 속상해 하는 것만으로는 마음자리를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나'는 왜 이런지 모르겠어."라고 할 때의 '나'는 생각하는 나를 '나'라고 여기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하는 나'로서 동일시하고 있는 '나'는 본래 생명으로서 마음이 아닙니다. 나타난 형상과 기억된 분별이 만들언 낸 매어 있는 '나'입니다. 그것에서도 법신이 떠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법신을 볼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생각은 법신에서 법신을 떠나 있는 것과 같습니다. 법신은 한계와 한계 너머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것으로 어떤 색상으로도 나타나지만 그곳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형색에도 머물지 않는 어떤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형색으로 드러남과 동시에 형색을..
아는 만큼 보인다. 마음 만큼 보인다.
귀신은 있다. 귀신은 없다. 귀신은 있다.
오면 오는 대로 알고 가면 가는 대로 알 뿐, 대상에 현혹되어 그것으로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상이 앎을 그것으로 알게 하는 것 같아 앎이 대상 따라 빨강 또는 파랑으로 아는 것 같지만 그냥 알 뿐, 빨강도 아니고 파랑도 아닙니다. 빨강 일때는 그것이 전부인 양 알고 파랑일 때는 그것이 전부인양 알며, 아무런 대상이 없을 때는 침묵이 전부인 양 그렇게 있지요. 어느 것도 다 비추지만 어느 것에도 따르지 않는 것이 진여인 마음의 작용입니다. 자신이 색깔을 갖지 않기에 머물지도 않습니다. 앎에서 보면 빨강이 생겨난 것 같지만 빨강이라는 앎은 생겨나는 것이 아니며, 파랑이 오면 빨강이 사라진 것 같지만 사라진 그자리가 파랑이 되니 앎이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침묵의 앎은 모든 색이 사라진 것 같지만 앎..
진여의 흐름은 잠시도 머묾 없는 무상 가운데 인연의 총상을 다 드러내기 때문에 기억된 대로 읽혀질 수 없습니다. 흐름을 이해하고 다음을 준비하는 기억은 생명이 살아가는 데는 너무나 중요한 요소였기에 대물림되었겠지만, 기억만으로 현재를 읽는 순간 현재의 무상과 어긋나므로 기억이 망념妄念이 됩니다. 무상한 연기를 새롭게 읽어내지 못하게 하는 기억들의 집합인 업식과 그 활동이 망심이 되는 까닭입니다. 기억은 언어로 된 분별을 집착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의 단어는 다른 것과 상관없이 그 자체가 하나의 이미지나 형상과 상응한다고 여기면서, 그 이미지와 형상을 붙잡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망념의 기억은 실재라는 이미지를 갖는 기억입니다. 이러한 기억들의 모임이 스스로를 하나의 단일체로 여기면서, 알고 기..
정말 일이 없는 것이 불안하지 않고, 내일의 걱정을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 행복을 나누기 위해서 일을 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가장 큰 이익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와 같은 생각을 하며 실천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사회가 큰 이익을 얻는 사회이며 온전한 이익이 되어, 그 안에서 사람으로서 생명의 이익을 진실하게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쉬는 것이 이익이 되는 사회가 마음 가운데 있는 나만의 한정을 고집하는 세계를 다 버릴 때 완성된다고 생각됩니다. 무언가를 바라는 바가 성취동기는 될 수 있지만, 비교로써 이익을 추구한다면 끝이 없겠지요. 끝없는 이익 추구는 아무도 쉴 수 없는 불안한 내일을 만드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마음을 쉬고, 일을 하면서도 쉬는 마음이 될 수 있을까하고 연구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