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실례를 하나하나 드는 이유는 깨달음이 무엇인지 알려드리기 위해서예요. 깨달음이라는 것을 너무 추상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많은 오해가 발생합니다. 괴로움은 다 무지로부터 일어납니다. 그런데 무지를 깨우친다고 해서 어떤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에요. 홍수가 났는데 깨달으면 내리던 비가 멈춘다던가, 가뭄이 들었는데 깨달으면 오지 않던 비가 내리는 게 아닙니다. 그런 일이 있을 때 불안하고 두렵고 짜증이 난다면, 그 괴로움은 나의 무지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깨달으면 그 괴로움은 사라집니다. 괴로움이 사라지면 심리적으로 편안한 상태에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책을 세울 수 있습니다. 가뭄이 들었다면 지하수를 판다든지, 냇물을 끌어 올 수 있겠죠. 홍수가 났다면 일단 피하고, 예방을 하기 위해서 둑을..
그런데 막상 정토회에 들어와 놓고는 '나는 휴지는 꼭 써야 되겠다. 이건 내 개성이다.' 이렇게 주장을 해서는 안됩니다. 반대로 정토회가 사람의 개성을 다 획일화시키려고 해도 안 되겠지요. 그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처럼 어떤 모임이나 어떤 일을 할 때는 그 성격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래서 참가하려는 사람이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하지요. 마찬가지로 결혼할 때도 그런 몇 가지 선택이 필요합니다.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으면 혼자 사는 게 낫습니다. 마음대로 하고 싶으면서 같이 살고도 싶다면 갈등이 생겨요. 가고 싶으면 가고, 오고 싶으면 오고, 저처럼 어떤 목표를 두고 함께하는 일 외의 개인적인 문제에서는 별로 구애를 받고 싶지 않다면 혼자 살아야 해요. (지금 여기 244) 그런 소망..
조금만 관찰해 보면 마음 가운데 두 가지 모순적인 것이 동시에 일어나 늘 교차합니다. 마음이 안으로 향하면 이게 보이는데 마음이 밖으로 향하면 이게 절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밖으로 향하면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를 죽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죽이고, 사랑하기 때문에 해어지고, 사랑하기 때문에 미워한다는 겁니다. 안을 향해 보면 이게 자기 모순이에요. 밖을 보면 이 두가지가 모순이 아닙니다. 이건 이래서 옳고 저건 저래서 옳아요. 사랑하면 사랑하는 대로 이유가 있고 미워하면 미워하는 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아내 입장에서는 '내가 당신을 사랑해서 이렇게 마음을 낸 것은 잘한 일이다. 그런데 당신이 내 마음도 모르고 늦게 왔으니 미워할 수밖에 없다.'라고 생각합니다. ..
자장율사 같은 위대한 도인도 한순간 아상에 사로잡히면 문수보살을 알아 볼 수가 없다. 그렇게 아상이 무섭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아상은 자기에게 사로잡히는 겁니다. 이 아상을 버리려면 최소한 어디에서 출발해야 할까요? '지금 내가 일으키는 생각은 대부분 나의 주관적 생각이다. 그러니 적어도 고집은 하지 말하야 한다.' 여기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아상에 사로잡히지 않겠다고 하면 '나는 아상을 사로잡히지 않았다'라는 상에 사로잡혀서 공현히 세상을 더 시끄럽게 만듭니다. 그러니까 내가 언제나 아상에 사로잡히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항상 자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거기서 깨어나지는 못해도 최소한 고집하지는 말아야 해요. (지금 여기 116) 2. 이렇게 우리가 늘 보고 듣고 부딪히는 시비를 일으키는 삶 가운데에 ..
희정 스님에게는 깨달을 기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첫 번째, 간음의 전신을 친견할 수 있다면 어떤 고난이 오더라도 참고 견디겠다, 말을 따르겠다 약속했는데 막상 결혼하라 하니까 20년 동안 승려 생활을 했는데 어떻게 그러냐며 그것만 빼고 다 하겠다고 했을 때입니다. 계속 자기 생각에만 빠져 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 노인네가 계속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는 것으로 보이지요. 자기의 모순을 보지 못하는 겁니다. 이때 자기가 자기에게 사로잡혀 고집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놓아버렸다면 어땠을까요? 바로 눈을 뜨는 것과 같이 단박에 깨달았을 텐데 그 기회가 몇 번이나 거듭되어도 보질 못했어요. 또 파계하면 안 된다고 그렇게 매달려놓고 막상 결혼을 하니까 금방 또 놓아버려요. 그러고는 보덕각시가 고녀니까 또 실망..
이게 다 자기 생각입니다. 자기 생각에 옳은 것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지만 자기 생각에 틀린 것은 부처님 말씀도 듣지 않습니다. 이게 아상입니다. 마음이 한순간에 사로잡힐 때 벗어나야 하는데 자기 마음의 변화를 살펴지 못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자기를 버린다고, 자기 생각을 내려놓는다고 하지만 천 번이면 천 번, 만 번이면 만 번 다 자기를 고집합니다. 어떤 때는 자기를 내려놓는다는 것 까지도 자기를 고집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고집할 때 자기가 자기를 고집하는 줄 알아야 내려놓을 수 있는데 자기가 자기를 고집할 때 자기가 자기를 고집하는 줄도 모릅니다. 자기를 비운다. 아상을 꺾는다는 것은 자기 생각과 다를 때 탁 내려놓고 "네!"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 97)
주위에서 다 유치원 다니고 초등학교 다니니까 당연하다는 듯 자기도 따라가고 중학교,고등학교, 대학교도 그렇게 따라가고 결혼까지도 남들 가는 대로 따라 해서 삽니다. 나이 드는데 시집 안 가면 무슨 큰 낙오자가 되는 것 같고 또 시집가면 얘는 꼭 낳아야 할 것 같고 낳으면 키워야 하지요. 또 언제 죽을지도 모릅니다. 또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도 몰라요. 그런데도 죽으면 천당 간다. 극락 간다. 어쩐다 말들이 많습니다. 직접 가 봤느냐고 물어보면 누가 그렇게 말하더라고 합니다. 이렇게 인생을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의해 살아지고 있기 때문에 인생이 꿈처럼 허망하고 뒤죽박죽인 것입니다. (지금 여기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