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에의 의지'에 대한 나름대로의 이해 내지 해석은 이렇다. 힘은 스피노자의 용어를 따르면 코나투스다. 존재를 지속하려는 경향성. 힘은 니체에 따르면 능동적인 힘과 반동적인 힘이 작용하는데 능동적인 힘은 좋아하는 것을 밀고 나가는 힘이고 반동적인 힘은 싫어하는 것을 밀어내는 힘이다. 힘에는 능동적인 힘 만큼 반동적인 힘이 대응하고 있다. 즉 싫어하는 힘이 더 세다면 좋아하는 힘이 약한 것이고, 만일 좋아하는 힘과 싫어하는 힘이 반반이라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고민되는 상황이다. 힘은 지속하려는 경향성이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려고 싫어하는 것을 싫어하려고 하는데 이때 경향성이 형성되는 흐름으로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긍정과 싫어하는 것을 싫어하는 부정이 이 경향 속에서 의지로 작용하게 된..
비록 변계소집성의 세계라 할지라도 그것은 잘못된 마음작용인 행의 집착에 따른 것일 뿐 그 근본은 무상무아입니다. 이제 수행에 의해서 무상무아를 보게 되는 순간 행의 지멸이 이루어지고 모든 집착이 사라집니다. 이 집착이 괴로움의 근원이므로 행이 지멸되는 순간 괴로움이 없어지고 열반의 맑고 고요하며 온갖 삶을 서로서로 있게 하는 따뜻한 자비의 기운이 넘쳐나는 세계를 이루게 됩니다.( p171) T1000.0 : 행[색수상행식]은 의지작용이다. 그런데 의지는 나의 의지라고 말하듯이 그 원인이 내가 아님을 유념해야한다. 의지는 생각이다. 를 인용하면 "모든 의지작용은 관념 자체일 뿐이다." 간단히 말해 의지는 저절로 떠오르는 생각처럼 생각일 뿐이란 점을 알아야한다. 의지는 긍정 또는 부정을 포함하는 관념인데, ..
정화스님이 풀어쓴 를 읽고 마음이 끌린 세 구절을 후기삼아 여기에 옮겨놓는다. - 그래서 경전에서는 부처님께서 자리를 움직이지 않고 삼천대천세계에 다 나툰다고 말씀하십니다.(p115) - 그러나 지행일치란 쉽지 않기 때문에 "이치를 아는 것은 바로 되지만 그것을 그대로 행하는 데는 차근차근 익혀야 한다[理卽頓悟 事非頓除]"고 에서는 말씀하십니다.(p175) - 어떤 조사 스님께서는 "나는 부처라는 소리가 가장 듣기 싫다"고 하신 말씀은 바로 이것을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252)
우리들의 삶을 봅시다.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는 그 낱낱의 사건들이 현실입니다. 이 현실의 삶, 곧 개인과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온갖 사건들에 대해 그 본질을 잘 알지 못하면서 욕심내거나 성내는 삶이 우리에게 불만족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크게 보면 그것은 사는 것을 좋아하고 죽는 것을 싫어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현실의 삶이 불만족스러운 것이 아니라 삶을 규정하고 있는 마음이 불만족스러운 것입니다. 이 마음의 주인은 자아의식입니다. 불만족[苦]의 주인은 인생이 아니라 인생을 잘못 아는 자아의식이 삶의 근거[集]가 되어 있는 경우입니다. 삶 자체가 괴로움이 아니라 삶을 잘못 이해하는 데서 불만족이 일어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불만족과 불만족의 원인을 없애고자 여러가지 가르침을 펼 수 있었습니다..
선과 악에 관하여 말하자면, 이것들도 역시 우리가 사물을 그 자체로 고찰하는 한, 사물의 있어서의 아무런 적극적인 것도 나타내지 않으며, 사유의 양태 또는 우리가 사물들을 서로 비교함으로써 형성하는 개념일 뿐이다. 왜냐하면 동일한 사물이 동시에 선이 될 수도 있고 악이 될 수도 있으며, 선과 악에 무관한 것이 될 수 도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음악은 우울한 사람에게는 좋고, 슬퍼하는 사람에게는 나쁘며, 귀머거리에게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그러나 사정이 그러할지라도, 우리는 이러한 말들을 보존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본성의 전형으로 볼 수 있는 인간의 관념을 형성하고자 하기 때문에, 이러한 말들을 앞에서 언급한 의미속에서 보존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다음에서,..
생과 멸을 통해서 무위법無爲法으로 있는 차별법을 살펴봅시다. 생이란 어떤한 것이 일어남을 이야기하고 멸이란 어떠한 것이 사라짐을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어떠한 것'이라는 명사를 사용하고 있지만 여기에는 생과 멸이라는 동사가 항상 동반하고 있음에 주의해야 합니다. 명사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 명사가 가리키는 것이 무상이며 무아인 것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곧 명사인 무엇의 생멸이 아니라 동사인 생멸의 쉼없는 무엇 되기가 진여,공의 끊임없는 자기 변화입니다. 그래서 변화가 그대로 진여, 공의 표현인 것에서의 생멸입니다. 이를 에서는 색色 그대로 공空이며 공 그대로 색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식은 고정된 대상없이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바꿔말하면 인식이 대상을 고정하면서 실체를 만들기 때문에 생멸 그..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몸의 모양[身相]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몸의 모양으로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몸의 모양이란 몸의 모양이 아니기[非相]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모양[諸相]이란 다 허망하다. 만약 모든 모양이 모양 아님을[非相] 본다면 여래를 보리라." T1000.0 : "여래란 삶의 열린 모습"이다. 기관 없는 신체는, 여래가 아니겠는가? 여래를 본다는 것, 기관 없는 신체를 어떻게 볼 것인가? '만약 모든 기관이 기관 아님을 본다면 기관 없는 신체를 보리라.' 인식의 결과는 항상 '나와 나의 소유가 상속'되는 것이므로 인식을 '자기 한정'이라고 했습니다. 이 자기 한정에는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