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타관[止觀]과 위빠사나관[觀觀]의 수행으로 인연마다 마음이 만든 줄 알고[止觀], 인연 따라 생기고 없어지는 것이 허깨비인 줄 알며 쓸데없는 집착으로 힘들어하는 중생에 대한 자비심을 길러[觀觀], '머묾 없는 마음[無住心]'으로 '마음조차 없는 마음[無心心]'을 증득하여야 대승에 대한 신심을 성취합니다. 지관 수행으로 신심을 성취한다는 것은 인연이 마음이며, 마음이 인연을 인연 되게 하는 것임을 사유하고 관찰하여 법계가 한마음이며 한 생명이라는 믿음이 확해진다는 것입니다. 인연이 마음이 되니 마음조차 없다는 데서 진여의 공성을 믿고, 모든 인연을 통해서 진여의 공덕이 실현되고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마음 그침인 '지수행'과 인연의 무상을 알아차리는 '관수행'을 같이 닦는 것이 필요합니다..
1. 사마타 수행은 모든 경계가 하나의 마음이라는 데 초점을 맞추어, 경계마다 분별하는 마음을 쉬고 마음 그 자체에 주의를 기울려, 마음 하나로 있는 것입니다. 분별하는 마음을 쉬는 것을 강조하여 '마음 그침[止]'이라고 한다면, '모든 인연을 마음이 만들었다.'는 하나의 사유 주제에 머문다는 데서는 '하나의 경계에 머무르고 있는 마음[一心境性]'이라고 하겠습니다. 허망한 분별을 그치고[止] 분별을 그친 마음을 알아차리고 있는 것[觀]이 '사마타관의 뜻을 따르는 것[隨順奢摩他觀]'입니다. '생각을 그치고 생각이 그친 상태를 다시 보고 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갖고 있는 분별을 놓고[止] 새롭게 보는 것[觀]이지요. '모든 것이 마음이다'라고 알아차리되, '마음'이라는 것조차 '마음 스스로가 마음..
'그침'을 "모든 경계상을 그친다[止一切境界相]."라고 해석하거나 "모든 경계를 그치는[止一切境界] 것[相]이다."라고 해석하거나 마찬가지입니다. 현재의 분별을 바탕으로 그것이 만들어 내는 언어와 형상의 분별을 가지고 실재를 보려는 의식 활동을 그쳐야 된다는 것입니다. 분별인 일상도 자성이 없지만 초월된 상태조차도 자성이 없다고 사유해야 합니다. 무자성無自性의 사유가 일상이 된다는 뜻으로 '모든 경계상을 그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경계의 분별을 넘어선 무상무상인 무자성적인 사유가 자리잡아야 됩니다. 무자성적 사유란 마음이 만들어 놓은 이미지에 머물지 않는 것이지요. 이것은 마음이 모든 것을 알아차리는 이미지는 만드는 공덕을 갖추고 있지만, 동시에 그 이미지를 비우는 자리에서 이미지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
정진하는 마음을 놓지 않고 마음마음으로 이어가다 보면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자리에서 깨달음이 드러날 것이며, 깨달음 속에 다시 삼세를 담아낼 것입니다. 삼세를 떠난 자리에서 삼세가 새롭게 되니, 정진하는 걸음걸음마다 만족된 삶을 살게 되겠지요. 삶은 수행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완성된 만족이 늘 수행이 되는 자리입니다. 수행이 늘 필요한 것은 길에서 길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잃은 데서 보면 수행이 필요하고, 길 위를 걷고 있는 데서 보면, 곧 걷고 있는 것이 길[道]이 되는 데서 보면 걷는 것이 '완성 된 도道'입니다. T1000.0 : 길에서 길을 잃고, 말하면서 말을 보지 못하고, 보면서 봄을 못보니 속도가 의미가 없다. 산다는 게 무엇인지, 말이란 것이 무엇인지, 본다는 게 무엇인지, 안다는 게 ..
정진이란 깨달음이라는 목표를 향해서 가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깨달음조차 무상無常이며 그곳에 생명이 안주하지 않는다는[無住]데서 보면, 늘 '새롭게 살기'일 뿐입니다. 그것이 정진이면서 깨달음이 되지요. 새롭게 되기 위한 새로움이 아니라 항상하지도 않고 머물지도 않는 그것이 늘 새로운 생명의 활동입니다. 그것은 형상을 만들면서 형상을 넘어서고 언어로 표현되면서 언어로 걸리지 않는 것이지만, 무엇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형상과 언어를 넘어서지만 형상과 언어 너머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생명의 활발한 인연이 어떤 형상에도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며, 언어표현으로 생명의 '새롭게 되기'를 다 나타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어찌 보면 생명이란 끊임없이 '새롭게 되기'를 욕망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세 번째는 '참는 것[忍辱]'을 통해서 신심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살면서 맞이하게 되는 수많은 인연들은 한 사람의 의지대로 될 수 없습니다. 다만 인연을 맞이하고 보내는 마음에 의해서 고해苦海를 만드는가 열반涅般을 사는가를 가름할 따름입니다. 인연따라 마음이 움직이면 하루에도 수천 번 고해와 열반을 만들 것이며, 인연에 흔들리지 않는다면 열반조차 없겠지요. 인연에 담담한 마음을 열반이라 부를 수는 있겠지만 고해가 없으니 열반이라는 이름도 없습니다. '참는 것'도 욕망이고 집착하는 마음을 쉬는 것이지만, '인연을 따르는 마음'에는 욕망에 흔들리는 마음도 없고 집착을 쉰 마음도 없습니다. 마음이 인연이 되니 잡으려 하지도 않고 보내려 하지도 않습니다. 잡을래야 잡을 수 없고 보낼래야 보낼 수 없는 것이 인연..
멈추고[止] 있는 그대로를 본[觀], 다음 어떻게 할 것인가? "너와 내가 지금 편한 것만 가져서도 선이 아닙니다. 다음 찰나에 좋은 결과가 있어야 합니다. 대치사집對治邪執. 우리가 지금 '나'와 '너'가 함께 편하고 내일도 편안한가 라고 우리 마음을 잘 들여다봐서 잘 다스립니다." T1000.0 : 말을 할때는 법을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활동을 할때는 너만 좋은 것이 아니라 나도 좋아야 하고 나만 좋은 것이 아니라 모두가 좋아야하는 것은 물론이고 지금은 나쁘지만 미래는 좋은 것이 아니라 지금도 좋고 미래도 좋은, 이른바 연기적 활동을 할 것인데 이는 자연의 활동에 계합하는 활동, 인연을 따르는 활동을 하는 것. [불수자성 수연성] 그러나 연기적 활동이 아무리 좋다해도 연기적 활동을 말하는 것이 다시 집착..
非空非海中 非隱山石間 莫能於此處 避免宿怨殃 비공비해중 비은산석간 막능어차처 피면숙원앙 허공이나 깊은 바다 속이나 깊은 산중 바위 틈에 숨는다해도 일찍이 내가 지은 악업의 과보는 이 세상 어디에 가도 피할 수 없다. 非空非海中 非入山石間 非天上地中 可遮業報處 비공비해중 비입산석간 비천상지중 가차업보처 공중에 뜨거나 바다 속에 들어가도 산속의 바위틈을 찾아 숨어도 하늘이나 땅 위 어느 곳에서도 이 업보를 막지는 못하노라 假使百千劫 所作業不無 因緣合遇時 果報還自受 가사백천겁 소작업불무 인연합우시 과보환자수 설사 백천겁이 지난다 해도 지은 없은 없어지지 않으니 인연이 마주칠 때 과보는 반드시 받게 되리라. T1000.0 : 지은 인연의 과보는 반드시 나타나는데 과보의 씨앗이 나툴 인연을 만나면 저절로 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