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번째는 밖에서 일어나는 어떤 소란에도 마음이 평안하여 놀라 허둥대지 않는 이익입니다. 처음에는 고요한 마음의 고요를 가져다주는 외연外緣의 역할을 하지만, 마침내는 '마음 쉼'에 의해서 모든 경계가 고요함으로 드러나야 하지요. 이때의 마음가짐 가운데 하나는 '원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경계가 고요하기를 원하면서 고요한 곳에서 수행을 하면 처음에는 도움이 되지만, 고요함을 원하는 마음은 고요함에 집착하는 마음을 낳기도 하며, 고요하지 않는 환경과 경계에 대해 분노하기도 합니다. 고요한 경계를 원하는 마음이 경계를 탓하는 마음으로 바뀌었지요. 이래서는 수행이 아니지요. 일상을 넘어선 고요한 경계조차 수행의 목표가 아닐진대 고요한 경계가 수행의 목적이 돼서는 곤란합니다. 고요한 환경에서 수행한다고 할지라도 ..
여덟 번째는 마음이 부드럽게 되고 관계에서 조화로운 삶을 열어 교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다른 사람에 의해서 괴롭게 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이익입니다. 부처님의 지혜가 완성된 수행자의 마음을 '원함이 없는 마음[無願]''머물지 않는 마음'곧'얽매이지 않는 마음[無住心]''얻음이 없는 마음[無得]'이라고도 합니다. 무엇을 가지고 자신과 다른 이를 재단하지 않는 마음이며, 재단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 마음이지요. 인연의 만남에서 어떤 것을 의도하고 그 인연을 그렇게 되도록 하는 것이 아닙니다. 머물지 않고 얻지 않는 마음이 인연의 조화에 어울리는 마음이면서 인연을 온통 다 드러내는 마음입니다. 무엇으로 인연이 된 듯하지만 인연의 장은 언제나 다시 무엇들을 변하게 하는 힘으로 하나의 인연을 넘어서므로 ..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 분별을 바탕으로 한 진여삼매와 일행삼매의 수행이 의심과 경쟁과 다툼을 불러일으키는 잘못된 분별을 제거할 수 있는 힘이 됩니다. 본래 결핍된 존재가 아닌 줄 체험할 때 마음 깊숙이 남아 있는 이웃과의 비교와 경쟁의식에서 벗어나게 되고 사회적 연대가 형성됩니다. 이웃이 생명을 함께 이루기에 경쟁 상대로서 이웃일 수 없으며, 경쟁 상대를 갖는 한 결코 충족될 수 없는 결핍이 자신의 삶을 힘들게 할 것임을 체험으로 알게 된 것이지요. 수행은 무엇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인연의 소통에서 하나 된 생명이므로 결핍된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며, 그와 같은 사유를 삶의 습관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치밀한 학습과 비판적 인 사유를 통해 흔들리지 않는 수행을 하면서, 경쟁과 비교하는 ..
그렇다 보니 두번째 이익인 마귀와 귀신 따위에 의해서 두렵게 될 일이 없습니다. 나타난 인연이 마음이 만드는 것인 줄을 아니 마귀와 귀신이 보이는 대로 있는 것이 아닌 줄 알 뿐만 아니라, 마귀와 귀신과 같은 인연의 만남에서 조차 열린 마음으로 함께 보듬어 아는 마음가짐이 귀신조차 함께 사는 인연으로 받아들이니 무서울 것이 없겠지요. 더구나 무아와 무상에 투철한 사유란 '가진 것이 없는 마음'인 일행삼매의 앎이니, 진여삼매를 전심으로 수행하고 있는 수행자에게는 두려움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마구니와 귀신의 장난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세상의 명예와 이익을 탐하지 않는 것이 수행자가 가진 첫 번째 마음가짐이므로 귀신이 속일 수 있는 근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T1000.0 : 귀신이야말로 실체가 없어서 보았다..
바른 삼매란 불교라는 집단 내의 수행이 아닙니다. 아견과 아애가 사라지고 명예와 이익 등을 탐하지 않는 살림살이로,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을 중첩된 인연의 자기라고 볼 수 있는 힘과 다른 개체이면서도 하나 된 생명처럼 사는 동체대비同体大悲의 실천에 있습니다. 불교란 승단에 소속된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뜻이 아니라 무아無我 연기緣起에 대한 이해인 '해오'와 이를 체득한 '증오', 그리고 '자비의 실천'으로 인연의 삶을 함께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실천되고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에 의해서 내도內道[불교]와 외도外道가 갈린다고 하겠습니다. T1000.0 : 세상에는 불교와 불교 아닌 것으로 갈린다. 불교 내에서도 내도와 외도가 갈리고 불교 밖에서도 내도와 외도가 갈린다. 요컨대 안을 향하는냐 밖..
어떤 경우에는 수행자로 하여금 과거를 알게 하는 숙명통이나 미래를 예측하는 천안통 그리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타심통 등의 능력을 갖게 하기도 하고, 걸림 없는 말솜씨를 갖게 하기도 합니다. 마구니의 장난으로, 이와 같은 신통을 갖게 됨으로써 그것을 가지고 세간에서 명예와 이익을 탐하고 집착하게 됩니다. 연기법에서 보면 변화는 있지만 어떻게 변할 것인지를 정확하게 읽을 수 없으며, 과거의 일이라 하더라도 일어났던 대로 아는 것이 아니라 기억된 대로 안다면 숙명통이나 타심통의 신통이 얼마나 허술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기억된 대로의 과거도 있을 수 없으며 예측된 대로의 미래도 없습니다. 인과인과가 없다고 주장하는 가르침도 잘못이지만, 인과가 결정됐다고 주장하는 가르침도 잘못인 이유가 여기에..
일상에서 보면 삼매가 허상이며, 삼매에서 보면 일상이 허상입니다. 어느 것이 실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인연의 무자성으로 실재하지 않는 허상입니다. 허상이 실상인 줄 알아야 '일행삼매一行三昧'입니다. 일행삼매는 일상과 삼매 모두가 무자성으로 마음이 짓고 있는 경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며, 이와 같은 앎으로 집착의 흔적까지를 완전히 제거했을 때가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이란 삼매체험을 통해서 일상의 집착을 벗어난 마음이며, 삼매조차 집착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어떤 것을 경험했느냐가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는 것은 그와 같은 체험이 집착을 벗어나는 힘으로 작용할 때입니다. 삼매체험만을 깨달음의 영역이라고 집착한다면 그것은 마장으로 번뇌를 만드는 것입니다. 적멸과 열반을 말하고 체험했다고 해서 그 상..
선근이 있는 수행자라면 인연의 차이들이 앎으로 드러난 것이며, 앎이 인연을 결정하면서 다시 새로운 앎이 드러나도록 무상하게 변하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어떤 것도 인연을 떠나서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깊이 보고 아는 것이지요. 인연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것이 어리석음이며 무명이라면, 인연을 알고 차별하는 망념의 습관까지를 완전히 끊은 것이 깨달음입니다. 수행은 마음을 고요히 하여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것이 인연임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인연을 기억하고 인연으로 알아차리는 것이 정념이며, 무상과 무아의 삶을 살 수 있는 바탕입니다. 수행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방편이면서 동시에 깨달음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학습된 앎을 마음으로 기억하고 몸으로 익혀 가는 것이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