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당신은 그 당시에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는 것'을 피할 마법을 지니고 있었다고 쓴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 저는 제 아내의 재주 덕분에 찾게 된 카이저 빌헬름 기념교회 옆에 멋진 집에서 두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어요. 저의 집은 만남의 장소로 아주 적합했죠. 밤마다 친구들이 방문해서 함께 당시 상황에 대해 토론했어요. 늘 현관 벨이 울렸어요. "얘기할 수 있어요?"라는 질문을 현관문에서 해야 됐어요. 이게 혹시 밀고자가 있는지를 알려주는 우리의 약속된 표현이었습니다. 외적 위험이란 압박 하에 우리는 육감을,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람을 믿을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말로 할 수 없는 표식들에 대한 느낌 같은 것을 개발했습니다. 그런 논쟁과 토론의 밤에도 저는 종종 마술을 보였고 손님들을 향해 "신사숙녀 ..
자기연관성은 2차 수준의 개념들에서는 부정되지 않고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자기연관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떤 존재론적 사유의 토대 위에서가 아니라 상당히 역동적인 개념 틀이라는 기초 위에서 가능합니다. 고전적인 논리학은 '존재'에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하나의 진술은 진리 아니면 거짓이어야 하지요. 그러나 역설(패러독스)을 받아들이게 되면 어떤 상황의 역동성이 새로 도입된다는 것이 저의 주장입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의 존재(있음)에 대해서 말하는 게 아니고 이행(되어감)에 대해서 말하게 되고 시간차원을 끌어들이게 됩니다. 시소같은 메커니즘이 생겨서 긍정이 부정을 부정이 긍정을 낳게 되는 거지요. 진술의 진리는 거짓을 낳고 거짓은 진리를 낳습니다. (발명품 191) 자기연관성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당신이 어떤..
정보는 신호를 가지고서 뭔가를 시작하는 사람에게서 생겨납니다. 제 생각에 정보란 지각하는 의식 밖에 존재하는 사용대상이 아닙니다. 책, 신문, 녹음테이프, 비디오테이프, 교통표지판 등은 그러니까 정보를 갖고 있지 않고 다만 잠재적인 정보의 운반자일 뿐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구분입니다. 중국어를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은 단지 흰 종이 위에 있는 기묘한 닭발들을 모아 놓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상은 어떤 정보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세상은 그냥 있는 그대로 입니다. 이는 특정한 교통표지판을 보거나 붉은 신호등을 보더라도 우리가 운전면허증을 딴 사람이라야 우리에게 그 신호들이 브레이크를 밟고, 중립기어를 놓고 차를 세우게 만드는 정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신호를 정보로 바꾸는 것은 다름 아..
저는 '아무리 바보라 하더라도 배울 점이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냥 어리석게 살다 죽도록 내버려 둬라!'라는 멋진 오스트리아 격언으로 대답을 하고 싶습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 혹은 다른 위대한 사상가들의 문장 외에 대학의 정문 위에 적혀있어야 될 친숙한 격언들입니다. 이 문장들은 현대 경영과 무슨 관련이 있나요? 첫 번째 격언을 통해서 저는 기업 책임자에게 그가 자기 회사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뭔가를 배울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그는 저로부터도 또한 원하기만 한다면 뭔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두 번째 격언은 어떤 사람에게 뭔가를 가져다 줄 수 있는 가능성에 한계를 그어야 한다는 사실, 그러니까 통제될(할) 수 있음을 너무 믿어서 어느 누구든지 권위적 방식을 통해..
질문은 당신의 인식이론적 관점에서 볼 때 정신적인 건강함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입니다. 질문을 뒤집어 표현해 보면, 정신과의사들은 환각을 갖고 있고 망상에 시달리는 환자들에 대해서 그들이 "현실연관"을 상실했다고 말하잖아요? 그들은 은연중에 객관적으로 인식가능하고 그들이 엄연히 접근 가능한 현실이라는 것으로부터 출발하고 있으니까 그들의 진단개념들은 존재론적으로 오염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말이죠. 그 주제와 관련하여 정신과의사인 올리버 색스의 매력적인 책들 중의 하나에 관한 짧은 얘기가 떠 오르네요. 그 책 제목은 영어로는 'The man who mistook his wife for a hat.' 자기 부인을 모자로 착각한 남자이고 독일어로는 'Der Mann, der seine Frau mit eine..
당신은 제가 인간을 하나의 단순치 않은 체계로 파악하고 있음을 정확히 지적하는군요. 나는 그런 인간들이 모여서 함께 (예를 들면 가족처럼) 새로운 단순치 않은 체계를 형성한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형성된 체계가 닫혀 있다면 (가족은 대체로 문화적 사회적으로 상당히 닫힌 체계입니다) 구성원들의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체계 자신에 고유한 특정한 행동이 생겨나며 그런 행동은 어떤 구성원 혹은 구성원 전체를 불행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 소위 치료자의 과제는 서로 상호작용하는 사람들을 새로운 고유 행동으로 인도하거나 새로운 고유값이 생기게 하는 어떤 다른 시작값을 창출하도록 유도하는데 있습니다. 치료자는 (새로 만들어질) 고유 행동을 설명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
그러한 개념비판과 치료, 건강, 치유 등을 언급하는데 대한 거부는 영국 논리학자인 조지 스펜서 브라운을 생각하게 하는 군요. 그는 자신의 유명해진 저서 에서 관찰이라고 하는 것은 분별 행위로 시작된다는 가정에서 출발합니다. 내가 뭔가를 묘사하려 한다면 나는 먼저 어떤 분별을 결정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분별을 선택하는 것 자체가 무엇이 보여 질 수 있는지를 규정한다고 조지 스펜서 브라운은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보든지 간에 선악의 분별을 통해서는 빈부, 미추, 신구, 병과 건강 등의 분별을 가지고 보는 것과는 다른 것을 관찰할 수 있는 겁니다. 아주 좋은 지적입니다. 조지 스펜서 브라운에게서 '분별하라 그러면 세상이 나타나게 되리라'Draw distinction and a universe come ..
[연기적 인과]세상은 계획되로 되지 않는다. 인생은 맘 먹은대로 되지 않는다. 노력한대로 이뤄지지 않지만 노력하면 이뤄질 확률은 높아진다. 기상청의 비 올 확률 예보처럼.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고 그대로 이뤄지지 않을 수 있다. 인과율에 대한 미신이란,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괴로워하고 신에게 의존한다. 그러나 세상은 본래 계획되로 되지 않음을 안다면, 이뤄지지 않은 것에 괴로울 일 없고, [긍정의 긍정으로] 그 결과는 하늘에 맡긴다. 인과율에 의지하는 사고는 미신. 예측할 수 없는 삶 가운데 선택과 책임. [윤리] 욕심은 곧 미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