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에서 제8식 아뢰아식은 무부무기이며 항상 폭류처럼 흐른다고 한다. 강물이 항상 흐르고 있는데, 항상 그곳에 있는 같은 물이지만, 순간마다 새로운 물인 것과 같이 육식에서 행하는 선악업이 강물을 맑게도 탁하게도 하여 업을, 얼굴을 만들지만 강물 자체의 본성은 늘 그대로이어서 물이 탁하면 저절로 알아 자신의 몸을 더럽히면서 더러운 곳을 씻어준다. 그런데 물이 흐르면서 스스로의 탁함을 자정하는 것은, 청정하게 하는 힘이 그 자체로는 미약하나 육식의 활동에서 선업을 지어 그 흐름을 바꿀때 아뢰아식도 맑은 물로 그 얼굴을 바꾸는데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수행을 통해 업의 여력을 남기지 않고 더이상 바꿀 업도 소멸하여 완전히 청정해지면 그 흐름이 그치는 아라한이 된다. * 제8식이 잠재의식으로만 생각하면 안되는..
"이것이 있음으로써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부처님이 말한 연기법인데, 여기서 이것과 저것을 실체가 있는 단위로 파악한다면 연기법을 벗어나는 잘못된 견해이기에 이것과 저것도 모두 空하다라고 하여 공을 강조하게 되었다. 공이 연기를 이루므로 또 연기가 공이므로 연기와 공은 같은 것이다. 달리 말하면 연기를 강조하면 앎[識]이 들어나고 공을 강조하면 무아(無我)가 들어나는데 앎과 공은 둘이 아닌 하나 또는 둘이면서 하나다. 이와 같이 緣起와 空과 識과 無我와 中道는 같은 말이다.
에서 '깊은 반야바라밀을 닦는다'고 하는 것은 이것을 가르킵니다. 깊다는 것은 언어 표상 곧 이미지에 의한 관찰이 아니라 지금까지 익혀 왔던 언어 이미지와 형상으로부터 벗어나서 관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의 출발로 모든 법이 허상인 줄 알고[無疑],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과정에서 그 생각에 따라 욕심 부리지 않고[無貪], 성내지 않고[無嗔], 마음의 흐름을 그냥 지켜보는 것[觀]이 '공관'이 됩니다. T1000.0 : 언어 이미지에 매여 사는 것과 언어 이미지에 메이지 않는 삶의 차이는 전자는 좋고 나쁨이 있지만 후자는 좋고 나쁨을 떠나 좋음만 있는 것인데 이 좋음은 전자의 좋음과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전자의 좋음은 평안으로 가는 좋음, 기쁨이 아닌 불안한 기쁨, 기쁨 속에 슬픔도 ..
자아의식은 생명활동의 마음작용인데 생명활동의 변화를 相을 지어 인식하게 됨으로 앎이 생기고 앎을 통해 생명을 이어가는데 이 상을 분별하는 것이 意다. 즉 상과 의가 없으면 생명을 이어갈 수가 없다. 그런데 변화 속의 상을 그 자체로만 파악한 意는 그것을 소유할 대상을 만들어 스스로 자아의식이 된다. 이러한 과정은 우리가 어떻게 앎을 형성하는 가라고 물을 때 알게 되는 것으로 묻지 않는다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관계 속에서 파악하지 않으면 안될 것을 관계는 다 지우고 그 자체만 남겨 소유하게 되면 나머지가 소외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헌데 그 자체만를 소유하려하면 본래 소유할 수가 없을 뿐 아니라 그것으로 관계 속에 있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소외시키는 역현상이 자동 벌어져 스스로 괴로워..
옛날 사람들이 지구가 평평하여 끝이 있다고 잘못 생각했던 것처럼, 지금 우리는 生死가 따로 있다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죽고 산다는 것이 다 생각따라 죽고 사는 것이라 할 것인데 생각이란 게 어찌 죽고 살 수가 있는가. 생각이란, 허망한 분별이고 마음이니 그것이 無相한 줄 알고 그 마음을 따라 살지도 않고 그 마음을 버리지도 않으면 생사가 따로 없음을 알 것이며 모든 존재가 하나하나 생명이며 그것으로서 또 하나의 한 생명을 이루는 그 자체, 그 하나하나가 의미요, 목적이기 때문에 더 바랄 것이 없고 산다는 것 역시 아무 의미도 없고, 목적도 없고, 길가에 핀 들꽃처럼 그 모습 속에서 그 모습을 이루며 있는 그대로 그냥 사는 것인데, 이 그냥 그대로를 드러내는 것이 그야말로 완전하고 완벽하지 않는가.
貪心은 기쁨을, 嗔心은 슬픔을 바탕에 두고 있다. 해서 기쁨이 일어나는 것은 生으로, 슬픔이 일어나는 것은 死로 생각하기에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은 싫어하고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은 좋아한다. 이렇게 생사를 두고 기쁨과 슬픔이, 탐심과 진심이 메여있다. 하여 생물학적 생사는 말할 것도 없고 사는 동안의 일상도 끊임없이 생사를 이어가고 있다. 그런데 생사가 없으면 기쁨과 슬픔, 탐심과 진심도 없게 된다. 따라서 생사에 메이지 않고 싶다면 탐심, 진심을 버리려하기보다 생사가 정말 없는 줄을 사무치게 알기까지 파고들어야 한다. 내가 없다면 생사가 가능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