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철학에서는 현상의 변화 이면에 변화하지 않는 실재로서의 존재를 실체로 여기고, 그것이 진실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그와 같은 실체로서의 존재는 오직 망념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봅니다. 한 개체로서의 '빔[空]'이 다시 전체의 인연을 나타내면서, 함께 살아가는 무상한 변화가 '실實'이 됩니다. 그래서 실도 아니고 허도 아니라고 합니다[無實無虛]. 서양에서 말하는 현상 너머의 실재가 아니라, 전체를 아우르는 인연의 현상을 진정한 삶으로서의 실實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곧 서양에서는 변화하는 현상의 환幻 너머의 실재를 이야기한다고 한다면, 불교에서는 환 너머의 실재야말로 환도 되지 못한 환이라는 뜻에서 망념에 의한 집착이라고 봅니다. 오히려 환이 환인 줄 알면서 환의 실재성을 놓는 순간..
망념이란 무상한 변화를 놓치고 그 가운데서 언어에 맞는 실재를 구성하고 기억하며, 다음 찰나의 변화를 놓치게 하는 습관적인 생각입니다. 습관이란 뜻에서 알 수 있듯이 현재를 보는 것이 아니라 습관이 현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은 현재를 살지 못한 것입니다. 그 습관이 자아나 자성을 만들고, 다시 자아 관념과 자성이 있다는 생각이 습관을 키워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습관적인 앎과 행동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현재의 인연은 끊임없이 새로운 모습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습관적인 앎과 다르게 창조적인 삶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를 놓치고 지루한 일상을 살고 있습니다. 때문에 일상의 지루함이란 습관적인 업의 관행이 나타난 것이면서 다른 한편 제대로 된 삶을 살라는 신호도 됩..
생이 멸을 담고 있고 멸이 생을 담고 있으므로 생멸이 하나이다라고 말한다. 예컨데 천으로 모자를 만든다면 모자가 생겨났지만 모자 이외 것으로 생겨날 여력, 가능성은 멸한 상태인데 정확히 표현하면 멸한 상태로 살아 있으며 다시 모자가 멸해 천으로 돌아간다면 천이 모자 이외의 것으로 생할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우주의 모든 에너지는 없어지지 않고 그 모양을 바꿔 표현된다고 한다. 에너지가 뭉치면 어느 순간 물질이 되고 물질이 흩어지면 에너지로 있어 물질과 에너지가 등가다. 물질 에너지가 다해 쓸모없는 에너지라하더라도 인연 조건이 형성되면 쓸모있는 에너지로 됨으로 쓸모없는 에너지가 쓸모없는 에너지인 것은 그러한 조건을 만나기 때문이고 다른 인연의 장이 형성되면 그자체가 쓸모있는 에너지로 변하는 것이다. 쓸모..
자성이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고 자성이 없다라고 정의할 수 없는 인연에 대한 바른 안목을 갖추게 되면, 스스로의 삶을 창조적으로 살아가는 길이 됩니다. 단지 기억에 의해서 만들어진 시공의 제한에 얽매이지 않게 되고, 동일한 자아를 인식 대상으로 세워 놓고 속는 일도 없습니다. 번뇌의 자성도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번뇌가 자성이 없으니 해탈도 자성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번뇌로부터 해탈되었다고도 할 수 없는 해탈의 삶을 살게 됩니다. T1000.0 : 팔정도의 첫번째가 正見이라고 한다. 바른 견해, 바른 안목이 첫번째다. "방향이 틀리면 속도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한다. 부지런히 열심히 살아도 아무 것도 남지 않는 허탈한 삶으로 느낀다면 방향이 틀리기 때문일터. 나아가 사회 역시 빠..
지혜가 성취되면 자성이 결정되어 있다는 것의 허구를 체득하게 됩니다. 또한 지혜인 바른 판단도 단지 인연처에서 그렇게 판단될 뿐, 그 판단의 내용이 인연처의 바뀜과 상관 없이 언제 어디서나 진리라고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진리가 인연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성 없는 무상한 인연의 드러남이 진리입니다. 진리라는 자성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반야 공관에 의해 체득된 지헤입니다. 인연이 지혜로 드러난 것입니다. 자성도 없고 타성도 없는 것이 무자성의 인연이 되나, 인연의 비움이 무자성이고 공성이고 지혜일 뿐입니다. 모든 법은 인연의 어울림에서만 자신의 자신의 모습을 갖게 됨느로 자신을 드러내면서도 그 모습에 머물기를 고집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습 없는 삼매[無相三昧]가 반야의 세..
이것과 저것이 먼저 있어 인연의 장이 성립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연의 장에서 이것과 저것이기 때문에, 인연의 장에서 이것과 저것을 분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연이 바뀌면 이것과 저것도 다른 이것과 저것이 됩니다. 더구나 인연의 장은 무자성이 특성이 때문에 이것과 저것이라고 할 것도 실제로는 없습니다. 끊임없는 변화의 인연만이 있습니다. 인연은 무엇의 원인이 아니라 그 자체가 그저 그렇게 흐를 뿐입니다. 인연의 장에서는 실제적인 자아가 없습니다. 만일 실재하느 자아가 있다면 인연이란 말이 성립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관계를 꿰뚫어 알아차려야 합니다. T1000.0 : 내가 있고 따로 너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실제로는 인연의 장에서 그 모습 그대로 너와 나로 표현된 것이므로 이 표현이 본래면목..
오늘 한 선배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보며 윤회를 이해하게 되었다. 윤회는 실체로서의 '내'가 있어 다른 무엇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짓는 업식이, 즉 나만의 貪심과 嗔심을 내는 마음자리가 윤회하는 것이다. 지금의 나는 어릴 적 내가 아니지만 탐심과 진심을 내는 마음자리는 탐심과 진심을 낼 조건과 조우하면 여전히 같은 마음을 내도록 반복한다. 탐심과 진심을 내는 마음자리가 바로 나라고 할 것인데, 이 나가 없다면 탐심과 진심을 낼래야 낼 수가 없는 것이고 탐심과 진심이 없다면 윤회가 있을 자리도 없다. 그러므로 無我인 줄 안다면 윤회도 없다. 단 실재로 윤회를 떠나려면 머리로가 아닌 몸으로 무아의 삶이 살아야한다. 탐심과 진심을 일으키는 것이 선악업을 짓는 것인데, 선업을 지으면 복덕을 받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