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별, 주체, 대상, 타자, 소외, 결여, 소유, 쾌락, 집착 나는 이 목록을 쥐약으로 여긴다.
언어는 나눌 수 없는 하나를 둘로 나눠 둘이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대상화, 타자화하며 소외시킨다. 소외는 소유를 유발하는데, 나눌 수 없는 것을 나눈 것이기에 대상도, 타자도, 소외도, 소유도 없고 오직 하나의 흐름, 물결치는 흐름만이 있을 뿐이며 이것이 우리의 삶자체이다. 따라서 우리가 언어를 사용할 때에 언어의 사용을 무분별의 분별이 되도록 해야한다. 언어가 분별할 수 없는 것을 분별하는 것임을 바로 알고 있어야한다. 이러할 때 비로소 언어 역시 흐름임을 깨닫게 된다. 마뚜라나의 통찰이 주목하듯이, 언어는 행위의 조정들의 조정이다. 언어가 출현하는 때는 바로 조정의 조정이 이루어질 때이며 이것이 순환하여 배치를 이루면 대상이 출현한다[이름 붙여진다]. 대상이 먼저 있고 언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반대..
불교 유식의 가르침을 통해 말하면,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는 '그린다'만이 있게 된다. 나[인식주관]와 그림[인식대상]이 사라진 그린다의 흐름만 있을때 그림은 예술이 된다. 나는 그림을 그리면서 점점 집중하게 되고 나와 그림이 하나로 통합되면 그린다만이 있게 되는 것인데,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이 "무엇이 그림을 그리는지 모른다"고 했던 말은 이런 차원으로 받아들여진다. 이와 반대로 그림을 그릴 때 그림을 타자화하고 내가 그림을 그린다고 그림과 나를 분별할 때는 기술의 차원을 넘지 못하는 것 같다. 흥미로운 것은 베이컨은 자신의 그림에 연습이란 말을 제목에 붙였는데, 아마도 그는 그림을 통해 그만의 방식으로 수행을 한 것이 아닌가 한다. 화가에게 삶이란 그림을 그리는 것이니 그 자체가 수행이었다. 삶이 곧..
삶은 원인들의 무한한 연쇄로 이루어진 흐름이고 이 흐름은 생성과 소멸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흐름이다. 즉 삶은 연기의 흐름이고 우리는 흐름을 앎의 흐름으로 인식한다. 순간순간이 앎의 흐름이며 의식의 흐름[흐름의 의식이라 해야 더 정확하지만]이다. 가령 무슨 일을 접할 때 "힘들어도 재밌어요"라고 하는 것은 몰랐던 앎을 경험하는 것으로 새로운 재미[기쁨]가 새로운 앎으로 인식되고 그 앎으로 인해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새로운 세계는 편견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 볼 때 열리는 앎의 장이며 삶은 자연히 앎의 장이 무한히 확장되는 방향으로 흐르는데 단지 우리가 그것을 알지 못할 뿐이다. 그러니 순간순간 깨어있으라,한다.
에 나오는 차제걸이는, 부처님이 천여명의 제자들과 줄지어 걸식을 하신 것은 그 자체로 수행이었다. 걸식을 하는데 마음에 아무 장애가 일어나지 않아야하며 이는 뻔뻔함과는 무관한데, 왜냐하면 이들은 가난한 집이나 부자집이나 편한 집이나 불편한 집이나 어떤 구분도 두지않고 차례로 딱 7개의 집을 들르기 때문이다. 아무 말도 없이 발우를 들고 서있다가 음식을 주면 주는데로, 없으면 없는대로 그날의 형편따라 살아간다. 마음에 차별을 두지 않을 뿐 아니라 마음에 아무 차별이 일어나지 않도록 정진하는 일상의 수행. [차제걸이] 1. 차별을 두지 않는 것으론 부족하다. [차례로 간다][욕계] 2. 차별이 일어나도 아무런 장애가 없다. [일곱 집만 간다][색계] 3. 차별이 일어나지 않는다. [차제걸이 수행의 완성][무..
"그래 보살을 누가 보았다더냐?" "물 얻어먹으러 절에를 들어갔더니 중들이 서로 지껄입디다. 서울서 온 유명한 중이 보살에게 혼이 났다고." "그래 보살이 어떻게 생겼더라고 말하더냐?" "그 보살은 늙은 중이고 보살이 데리고 온 제자는 상투한 사람 모양인데, 그 얼굴들에서 붉고 푸르고 한 빛이 뻗치어 나오더랍디다." 하고 천왕둥이가 지껄이는데, 꺽정이는 대사를 돌아보며 웃고 있었다. 저녁상을 치운 뒤에 덕순이가 대사를 돌아보며 보우는 전고에 드믄 요승이라고 말하고 "그자의 말로가 어떻게 될까요? 선생님은 짐작이 없지 않으실터이지?" 하고 물으니 대사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이 없었다. 덕순이가 얼마 동안 그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가 "그래 그자가 제명에 죽겠소?" 하고 다시 물으니 대사가 말이 없이 머리를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