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想을 만든다. 상이 없이는 살 수가[또는 알 수가] 없는데, 이 상은 意가 我[주체]와 法[대상]을 만드는 방식으로 새겨진다. 다시말해서의 저자들의 표현으로 말하면 언어는 "의미화"와 "주체화"를, 즉 의미화라는 意의 작용과 주체화라는 我와 法의 작용이 교차하면서 相이 새겨지는데 이 상이 바로 얼굴이다. 얼굴은 인간의 신체를 벗어나 모든 사물에도 적용되며, 이 얼굴이 상으로, 즉 이미지로 새겨진다. 그런데 이 상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얼굴이라는 것이 원래 하나가 있고 그것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얼굴이 만들어진다는[생멸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즉 얼굴은 없으며 또한 얼굴이 없는 것도 없는 것이다. 비유로 말하면 얼굴은 안개처럼 있는 듯 없는 것[또는 없는 듯 있는 것]이다. 얼굴과 상..
차이를 그대로 인정하고 이해하는 것으로 그쳐야지 차이를 통해 우월과 열등을 주장하게되면 삶의 왜곡이 생긴다. 쓸모있음과 쓸모없음은 그자체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고 어떤 조건에 놓이느냐에 따라 변하는 것이므로 차이의 우열이 있을 수 없다. 쓸모없음이 쓸모있음으로, 쓸모있음이 쓸모없음으로 변하는데는 그것이 조건에 따라 쓸모있음에는 쓸모없음을 감추고 있고 쓸모없음은 쓸모있음을 감추고 있다. 즉 인연에 따라 그 모습을 나투는 것이기에 차이는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이해하는 것으로 족하다.
1. 배려는 상대가 스스로 변화할 기회를 점점 없애는 행위. 배려를 끊고 교감하는 감성은 상대를 동등하게 이끌어낸다.
지혜는, 어떤 상황에 접할 때 습관적으로 마음에서 일어나는 언어쓰임이나 행동양상을 그치고 맞닿은 상황에서 어떤 것이 진정한 언어쓰임이고 행동양상인지를 꽤뚫어 답이 나올때, 그 답이 지혜다. 즉 지혜를 내기 위해선 상황을 있는 그대로를 보아야 한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선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습관적인 생각들을 멈추어야한다. 지혜는 지식을 쌓아야 생기는 것이기 보다 오히려 생각을 비우고 판단을 지연시킬 때, 즉 채우기보다 비울 때 나타난다. 그러니 일단 멈춰라. 그리고 보라.
건강한 사람은 먹고 싶은 것을 먹으면 건강해지고 반대로 환자는 먹고 싶은 것을 먹으면 병약해진다. 건강한 사람의 몸은 신체의 균형이 한쪽으로 치우치면 조화를 이루기 위해 먹고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예컨대 짠 것을 많이 먹으면 물이 먹고 싶어지고, 또 메운 게 필요하면 매운 음식이 땡긴다. 신체가 저절로 알아 몸의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중도를 이루는 것이다. 반면 환자는 몸의 중도를 무시하고 습관적인 입맛에 기들여져 있어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수록 몸의 균형을 이루지 못한다. 신체가 중독이 되어 중도를 이루지 못하는 것인데, 술이나 담배가 그렇다. 중독된 신체는 자신의 건강을 스스로 지키지 못하고 외부의 의탁해 먹을 것과 먹지 않을 것을 구분해야한다. 즉 의사의 처방에 의존해야하는 신체인 것이다. 우리의 ..
스피노자의 정의를 빌자면 욕망은 욕구와 같은 것인데, 욕구를 의식하는 것이 욕망이다. 때문에 욕망은 인간에게만 한정된다. 따라서 처음에는 욕구가 있고 인간은 이 욕구를 의식해 욕망한다. 처음 욕구가 생기면 욕구가 채워지느냐에 따라 욕구는 기쁨 또는 슬픔으로 변한다. 이제 이 기쁨 또는 슬픔을 의식하게 되면 욕구는 욕망이 되는데 이때 욕망은 두가지로 갈린다. 욕구를 의식하는 욕망이 기억으로 새겨져, 부재로 인한 집착을 하게 되면 욕망이 쾌락과 죽음으로 가는 길이 하나이고 반면 기억이 아니라 망각으로 새겨지면[비우면] 욕망은 현재의 것, 새로운 것을 욕망하게 되어 능력과 생산의 길을 간다. 예를 들어 가수가 노래를 부르고 싶은 욕구를 채우고 이것을 기쁨 또는 슬픔으로 경험하는데, 가수가 큰 인기를 얻어 큰 ..
想은 意가 만들고 상은 識에 의해 변한다. 상은 그자체로 앎의 흐름이므로 앎을 앎으로만 삼으면 괴로움이 없지만 이 앎을 후찰라에 부재로 인색해 상을 지으면 탐심과 진심이 동반한다. 즉 부재에 대한 집착을 일으켜 현재를 보지못하게 된다. 따라서 오온, 색수상행식의 순환에서 상이 식에 의해 변하게 될때, 상과 식 사이에 있는 행을 닦아 상이 있는 그대로의 상으로서의 앎이되도록 수행한다. 수행은 탐심과 진심이 동반하지 않도록 상 그대로의 상을 앎의 흐름으로 주시하는 것이다. 상을 짓는 것을 거부할 필요는 없다. 그 상을 고집하여 탐진심을 일으키는 것이 주목할 문제일 뿐이다. 예컨데 좋은 사람을 떠나보낸다고할 때 좋은 이라는 상이 잘못된 게 아니며 그자체가 있는 그대로의 앎이다. 다만 이 상을 다음 찰라에 부재..
앎이 생겨 앎을 성취하는데, 성취가 자취를 남겨 상이 만들어지고 상에 대한 탐심과 진심이 동반한다. 상이 만들어지는 것은 원래 좋은 것인데, 좋은 것이 탐심과 진심과 결합하여 상이 실체로 자리잡아 삶을 지배하면 나쁜 것이 된다. 즉 허상을 쫒는 삶을 살게된다. 그러므로 상이 만들어지더라도 그것이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실체가 아닌 허상을 탐하고 성내는 것은 마땅치가 않다. 어리석다. 이 어리석음이 괴로움을 만들고 있고 괴로움은 다시 이런 전도몽상의 사실관계를 알리려하고 있다. 해서 이와 같은 과정을 바로 알아 탐진심이 일어나도 끄달리지 말고 관계속에서 처해진 상황에 따라, 인연에 따라 이루면 탐진심을 내려놓은 바가 된다. 내 경험으로 보기에 탐진심을 내려놓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참는 것인데, 이는..